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행인 Mar 26. 2021

봄 찾아 걷는 정여립 길

杏仁의 길 담화 _월암마을 길 

한벽당에서 냇물을 거슬러 남쪽으로 걸으면 군데군데 달팽이 표식을 그린 팻말이 섰다.  ‘아름다운 순례길’ 안내판이다. 아름다운 순례길 제1코스는 풍남문-한옥마을-한벽루-치명자산 성지-월암마을-점치고개- 화심-송광사까지 26.7㎞구간(도로 기준)이다. 한벽루에서 월암마을까지 바람 쐬는 길을 따라 걷는 구간은 6.2km, 보통 걸음으로 쉬지 않고 걸으면 한 시간 반 거리다. 하지만 아름다운 순례길이라 하기엔 너무도 파란만장한 비극의 역사가 담겨있는 길이기에, 걸음을 빨리할 수가 없다. 

 팻말을 더듬어 한 굽이 넘어가면 애기바위가 나오고, 한 굽이 넘으면 각시바위, 또 한 굽이 넘으면 서방바위가 나온다. 그 너머  위쪽으로 바위산 월암이 있고 그 아래 큰 소(沼)의 흔적이 있다. 

 파소(破沼)다. 다름 아닌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鄭汝立)의 생가가 있던 자리, 행정구역상으로 완주군 상관면 신리 월암마을이다.

 소는 그 집뿐 아니라 이웃집들까지 모두 파내고 만들었다. 역도의 땅이라 해서 마을을 송두리째 파내고 물길이 휘돌아가게 만든 자리였다. 지금은 물줄기가 약하지만 예전에는 시퍼런 물이 역모의 공포만큼이나 무서웠다고 전해진다. 

 월암 건너 마을 이름이 댁 건너 마을이다. 정여립 선생 댁 건너 라는 뜻이다. 윗마을은 상댁건너, 아랫마을은 하댁건너라 했다. 그만큼 정여립 선생을 높여 부른 것으로, 선생을 만나기 위해 선비들이 구름 떼처럼 모여들었던 마을이다.       

 정여립!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던 그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개혁을 추구한, 행동하는 사상가요 개혁가이자 당대의 선구자였다. 그의 선구적 사상은, 촉나라가 아닌 위나라를 정통으로 본다는 정통론, 천하는 공물(公物)인데 어찌 주인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천하 공물론, 누구를 섬기든 임금이 아니겠는가 하는 선양(禪讓) 론으로 특징지어진다. 피폐했던 조선사회를 비판적으로 보고 아래로부터 백성을 위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한 그의 사상은, 당시 주자 성리학을 절대적으로 맹종하는 조선왕조의 명분론에 대한 도전이자 왕조의 이데올로기를 부정한 것이었다. 그의 급진적 개혁사상과 행보는 때마침 격화되기 시작한 당쟁의 구도 속에 휘말리면서 ‘기축옥사’라는 희대의 정치 보복극의 빌미가 되고 말았다.       

 시대를 앞서 나간 진보적 개혁사상과 주자 성리학을 벗어난 시국관이 조선의 양반관료사회에 적응하기는 영 힘들었나 보다.

     전주의 명문 출신으로 일찍이 율곡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두 사람의 각별한 후원과 촉망을 받아 이목을 끌었던 그다. 총명하고 논변을 잘해 이치를 탐구하는 데에 힘썼으나 직설적이고 감정적인 성격 탓에 일부 서인 인사들과 척을 졌고, 본래 서인 세력이었으나 동인으로 전향해 논란의 대상이 됐다. 스승이던 이이를 비판한 일은,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조선 사회의 당쟁에서 그를 배신자요 반역자의 대명사로 낙인찍는 명분이 됐다. 결국 그는 조헌, 정철 등 서인 인사의 집중적인 비판과 탄핵의 표적으로 지목받았고, 선조의 눈 밖에 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전주로 낙향한 그는, 독서와 손님 방문 등으로 나날을 보냈으나 문무를 겸한 호방함과 평등사상을 실현하는 대동계 조직을 통해 명망을 떨쳤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다.  감사와 수령들까지 찾아와 인사를 드렸고 무사, 무뢰한, 노비에서 승려, 산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정여립은 진안 죽도(竹島)에 서실(書室)을 짓고 사회(射會)를 열어 강론하면서 사람들을 규합해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했다. 대동계는 신분에 제약을 두지 않고 가입을 허가해 무사와 천노들도 있었다. 그는 이들에게 강론해 개혁 사상과 애국심을 심어 주고, 혹은 말타기, 활쏘기, 칼 쓰기 등의 무력도 연마시켰다. 매달 보름이면 한 곳에 모여 활쏘기 대회를 열고 술과 음식을 나누어 먹이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았다고 한다.  1587년, 왜적의 침입으로 전주 부윤 남언경이 도움을 청하자, 정여립은 대동 계원들을 이끌고 출병해 녹도와 손죽도(損竹島)에 침범한 왜구를 물리치기까지 했다. 

 호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간 대동계 조직은 더욱 커져 황해도까지 진출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당시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왕에게 전해지자 조정에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해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한 뒤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589년, 조선조 당쟁사에서 처음으로 불어 닥친 피바람, 이것이 기축옥사다. 

 기축옥사의 피 비린내는 지독했다. 3년에 걸쳐 동인 출신만 천여 명이 죽었다 하니 처참한 피바람이 지나간 떼죽음의 현장인 셈이다. 심지어 당시 전라도 도사 조대중(曺大中)은 정여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유로 장살을 당했다 하며 이듬해 정여립의 시신을 추형(追刑)하는 현장에서 추국에 참여한 형조좌랑 김빙은 날씨가 추워 눈물을 닦았다가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모함을 받아 사형당했다 한다.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했다가 사망했다. 이후 그의 집은 허물어지고 파헤쳐져 소(沼)로 변했다. 

 파소 맞은편에, 그 한 많은 역사를 아는 듯 파소봉이 우뚝 서서 침묵으로 세상을 지켜보고 있다. 나는 이 길을 정여립 길이라 부르기로 했다.       

정여립이 진안 죽도를 오갔다는 월암마을 뒷산길은 마재를 거쳐 화심, 송광사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순례길’ 첫 번째 노선이자 등산로로 이용되고 있다. 

 월암마을 뒷산을 오르면 마재에 이르고 길을 따라 재를 넘으면 마재 골 물머리와 상관수원지 물가 길을 거쳐 소대판 마을을 지나는 순례길로 이어진다. 이 길은 신리 만덕 정 쪽에서 오르면 마재봉(해발 321m)과 달래봉(해발 436m)을 돌아 상관 수원지를 내려다보며 감아 도는 등산로다. 산길이라 걸어서 세 시간 반이 걸린다.

 산길에 잠시 올라 마재에 이르니 멀리 말없는 산봉에 둘러싸인 상관수원지의 물이 찰랑거린다. 호수는 하늘 아래 산 아래 고요히 푸르다. 이 길을 말없이 디뎌 걸으면 어떠랴. 순례자의 발걸음에 산천은 또한 조응해 알싸한 바람과 맑은 물소리로 말을 걸어오고 철마다 시절마다 온갖 꽃들을 남김없이 별들처럼 피워내지 않겠는가?

 _김행인(金杏仁. 시인. 마실길 안내자)


이전 03화 중바위 아래 바람 쐬는 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