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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gryJohn May 27. 2019

다섯 번째 생각: 내가 수염을 기르는 이유

어릴 때부터 피부가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아니다 썩 나쁜 편이라고 하는 것이 적절할 거 같다. 건조한 것 같기도 하고 유분도 많이 생기는 환상적인 조합을 가진 그런 욕심 많은 어메이징 한 피부다. 그런 얼굴에 수염도 많이 나는 그런 얼굴을 가지고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쯤부터 수염이 꺼뭇꺼뭇 눈에 띄게 나기 시작하더니 잡초처럼 내 입 주위, 턱 주위 그리고 볼때기 주위에 사정없이 퍼지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었다. 대학교를 지나 20대 중반에는 수염의 절정을 이루어 아침에 면도를 하면 그날 저녁때쯤이면 벌써 얼굴에 꺼뭇꺼뭇한 수염뿌리들이 육안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면도를 하면 할수록 왠지 털이 더 두꺼워지고, 강해지고, 풍성해지는 착각까지 들었다. 수염에 대한 지금까지의 내 여정을 잠시 이야기하려 한다.


고등학교 때 4년간 학교 테니스부에서 주장으로 활약했다. 참고로 미국은 보편적인 고등학교 교육이 4년이다. 테니스는 특성상 시즌이 봄에서 시작해 여름에 끝난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이 넘었기 때문에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4월부터 6월 말 정도 까지였던 거 같다. 매일 방과 후 오후 3시쯤부터 늦게는 오후 6시까지 테니스 연습을 하고 시합이 있는 날에는 저녁 7시 혹은 8시까지도 했다. 밖에서 하는 스포츠다 보니 햇볕이랑 늘 함께했다. 한국과 다르게 미국의 햇볕은 정말 강렬하다. 공기는 시원하고 습기가 없어 그늘에 있으면 시원하지만 햇볕 아래 5분 정도만 있어도 몸이 심하게 더워진다. 기본적으로 몸에 열이 많은 나는 남들보다 더 빨리 더 강하게 뜨거워졌다. 30도, 32도 정도의 더운 여름날 뜨거운 햇볕 아래 테니스를 몇 시간 정도 치고 나면 얼굴은 금세 새 빨게 진다. 땀으로 열로 범벅이 된 내 얼굴의 종착역은 피부 트러블이다. 덕지덕지 여드름이 내 얼굴을 점령했다. 누구에게나 고난스럽고 유난히 힘든 시기인 고등학교 시기. 피부 트러블과 늘 함께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 한국에서 5년 정도 일을 했다. 여러 가지를 느꼈지만 가장 놀랐던 것 중 하나는 한국사람들 피부가 대부분 너무 좋았다. 많은 관심, 노력 그리고 관리의 힘인 거 같다. 여성, 남성,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대부분 피부가 좋았고 굉장히 하얬다. 유난히 하얀 피부, 깨끗한 피부에 가치를 두는 한국문화의 힘이다. 특히 길거리를 걷다 보면 대부분 여성분들의 피부는 환상이었다. 약간의 문화적 충격을 느꼈다. 내가 한국에서 태어나고 어릴 때까지 한국에서 자랐기 때문에 인종(?)에 대해서는 전혀 거부감, 충격은 없었지만 피부에 대해서는 적지 않는 충격이 왔다. 미국에서는 남성, 여성 할거 없이 대부분 피부 아닌 몸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피부과나 피부를 케어해주는 곳도 거의 없을뿐더러 하얀 피부 깨끗한 피부에 대한 신적인 가치를 한국처럼 두지 않는 것 같다. 걷다 보면 흔히 자주 보이는 여러 피부과들을 보면서 한국은 정말 피부에 대한 엄청 가치를 두는 나라구나 하고 나름 놀랐던 기억이 있다.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나도 피부짱이 되기로 결심했다. 피부과를 예약해 정기적으로 관리를 받고, 햇볕에 노출될 시 꼭 선크림과 모자와 함께했다. 남자들이 쓴다는 비비크림도 발랐다. 공원에서 아주머니들이 쓰시는 창이 엄청 큰 얼굴을 거의 덮는 검은 유리창 같은 모자는 정말 걸작이다. 파워레인저인 줄 알았다. 확실히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만큼 서서히 내 피부는 좋아지기 시작했고 얼핏 한국에 사는 보통 한국 남자들의 피부처럼 되어갔다. 하지만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유전적으로 갖고 태어난 나의 수염을 굳이 없애고 환경적으로 시컴해진 나의 피부를 굳이 미백하는 나 스스로의 모습을 보고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전혀.


한국에서 5년 정도 거주 후 곧바로 독일 Bochum이라는 곳에서 2년 정도 유학생활을 했다. 독일 남자들은 한국 남자들과 다르게 대부분 수염을 기른다. 콧수염만 기르던 얼굴 전체를 덮는 산타할아버지 같은 수염을 기르던 대략 10명 중 8명 정도의 독일 남자들은 수염을 길렀다. 유학생활을 하면서 서서히 아주 자연스럽게 콧수염을 시작해서 턱수염까지 기르기 시작했다. 몸과 마음이 너무 편했다. 수염에 덮인 내 얼굴이 꽤나 괜찮았다. 일단 부분적인 면도만 하면 되므로 면도시간이 전체적으로 많이 단축됐다. 또한 얼굴의 대부분의 면적을 수염으로 덮으니 상대적으로 피부가 좋아 보이는 착시현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람 얼굴을 처음 봤을 때 아무래도 수염으로 먼저 눈이 갈 수밖에 없으니 상대적으로 수염이 없는 면적에 대한 관심은 이래 떨어질 수밖에 없는 거 같다. 아무쪼록 나는 독일 유학생활을 기점으로 아주 자신 있게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수염을 기르고 유지하기 시작했다. 유학을 성공적으로 끝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와서도 내 수염은 그대로 유지되어 지금까지 나와 함께 하고 있다.


서양문화에서 남자의 수염은 남성적 의미, 강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더럽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건 그 사람의 개인적인 취양, 의견이기 때문에 나랑은 상관없다. 한국도 역사적으로 볼 때 남자들은 늘 수염과 함께 했다. 조선시대 이후 근대화가 되면서 서양에서 건너온 양복을 입고 구두를 신고 면도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남성이 수염을 기르는 문화는 전 세계적으로 꽤 많다. 중동, 아프리카, 남미의 상당한 남자들도 수염을 기른다. 유독 중국, 한국, 일본 (일본은 남성의 수염에 대해서 조금 더 관대한 거 같다.), 베트남 등 많지 않은 아시아 국가들은 대부분 남성의 수염을 매력적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격렬히 운동하고, 격렬히 일하며, 격렬히 수염을 기르는 강한 남성이고 싶다. 더 이상 비비크림이나 피부과 따윈 필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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