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 군이 처음으로 폭행당한 것은 그가 태어난 지 일 년이 되지 않았던 때였습니다. 정확하게 11개월 하고 얼마 되었던 때였죠. 당시 최 군의 어머니는 집에 없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사기 위해 집을 비웠는데 집에는 최 군의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평소 최 군의 아버지는 아이를 돌본다거나 집안일을 돕는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지만 특별히 화를 낸다거나 아내에게 폭력적인 성향을 보여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최 군의 어머니는 자리를 비울 수 있었습니다. 최 군의 아버지는 딱히 정해진 직장은 없었는데, 이직이 잦았습니다. 최 군이 태어나기 전에는 일 년 동안 여섯 차례나 직장을 옮기기도 했는데, 말이 좋아 여섯 차례지 거의 수입이 없다고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나마 얼마라도 벌어오던 최 군의 어머니는 최 군이 태어나면서 집에만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육아를 도와줄 사람은 없었으며, 최 군을 보육시설에 맡길 수도 없었습니다. 물론 무리한다면 맡길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 최 군의 이름으로 나오는 보육료는 세 가족의 중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기에 그랬습니다. 최 군의 보육료는 최 군에게는 극히 일부만 사용되었으며 대부분 가족의 생활비로 사용되었습니다.
사건 당일 최 군의 아버지는 잠이 들어 있었습니다. 야간작업을 하고 이틀 만에 집에 들어온 직후였는데, 당시 11개월이 넘게 한 직장을 다니던 그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습니다. 아기가 태어난 것에 대한 부담감과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갈등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는데, 원래 사회생활이 원활하지 못하던 그는 당시 주변 사람들과 잦은 마찰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야간작업 중 여러 차례 다칠 뻔했고 실제로 허리나 팔목의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병원에 가는 일은 없었습니다.
문제는 최 군이 울기 시작하면서였습니다. 당시 최 군 가족이 거주하고 있던 곳은 방과 부엌 공간이 분리된 원룸 공간이었는데, 부엌 공간에 있던 최 군이 울기 시작하자 최 군의 아버지는 잠에서 깨어 최 군에게 다가갔습니다. 기저귀 한 번 갈아준 적이 없는 최 군의 아버지가 최 군을 달랠 수 있을 리는 없었고, 최 군의 울음은 극도의 스트레스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그는 아기의 가슴을 짧게 두 번 가격 했고, 아기는 더 큰 소리로 울었습니다. 그때 최 군의 어머니가 집안으로 들어왔고 그렇게 첫 번째 폭행은 끝났습니다. 최 군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만 알았다 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 이후, 약 4년 동안 최 군은 36차례 크고 작은 폭행이 있었고 중반부터는 최 군의 어머니도 그 사실을 알았지만 역시나 폭행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 하지만 저희 변호인 입장에서는 이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최 군의 아버지가 한 행동은 충분히 잔인하고 사회적 공분을 일으킬 만한 것이지만, 이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묻기에는 이들이 처한 사회적 환경이 너무나도 불행합니다. 먼저 최 군의 어머니 김 씨의 경우를 보면 아버지로부터 수차례 폭행을 당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김 씨의 아버지는 전형적인 알코올 의존증 환자로, 폭력적인 성향을 가진 자였습니다. 김 씨는 집을 나온 17살 이전까지 수 차례의 폭행을 당했으면 그보다도 김 씨의 아버지가 어머니를 폭행하는 장면을 수도 없이 목격하며 성장했습니다. 김 씨가 집을 나온 이후에도 폭행은 멈추지 않았으며 두 사람이 이혼한 후에도 김 씨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찾아가 폭행하거나 욕설을 퍼붓는 등 그가 사망하기 전까지 육체적 정신적 폭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최 군을 출산할 무렵인 24세에는 이미 우울증을 상당 기간 동안 겪은 것으로 판단되며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이런 우울증은 커진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정도가 될 때까지 아무도 김 씨를 돕지 않았으며 겨우 찾아간 상담 센터에서도 상담 몇 번이 다였습니다. 정기적으로 상담과 진단을 받을 수 있었지만, 당시 김 씨는 상담 센터의 자기 부담금 조차 부담할 수 없는 처지였기에 당시 사회적 제도는 그녀에게 도움을 줄 수 없었습니다.
최 씨의 경우에는 결혼 전이나 출산 직후 폭력적인 성향을 보인 적은 없지만 사실 중학교 시절부터 분노조절장애를 겪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분노를 표출하기에는 그는 학교에서도 가정에서도 작고 약한 존재였으며 그의 분노는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살 뿐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최 씨의 부모님은 최 씨가 여섯 살 무렵에 이혼했는데 그 이후로 최 씨는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때쯤 어머니에게 연락을 시도했는데 연락이 원활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최 씨의 어머니는 최 씨의 연락을 받고 그를 차단했는데 최 씨는 불행 중 다행히도 그 사실을 알지는 못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연락 시도는 최 씨에게는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아버지와 대화가 통하지 않은 지는 여러 해가 되었고, 학교에서 놀림을 당하거나 폭력으로부터 노출된 지도 여러 해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인간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그의 감정에 자리 잡게 되었고 그런 중 김 씨와의 만남이 위안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물론 결과적으로 둘의 만남은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재판관님, 이렇게 두 사람이 불행을 겪는 동안 사회제도는 두 사람을 돕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도울 수가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은 여러 제도가 있음을 전혀 몰랐으며 주변에서도 그랬습니다. 자기 자신조차 돌보지 못하는 두 사람이 만나 다른 생명을 낳는 동안 누구도 두 사람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사건의 책임을 온전히 두 사람에게 돌리기에는 사회의 책임이 너무 크다고 생각됩니다. 아직도 저희에게 좋은 판례가 되고 있는 '성냥팔이 소녀'사건을 보면 고아가 대량으로 발생한 경제적 사회적 배경이 소녀의 부모에 대한 판결에 영향을 미쳤음을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직 최 군 부모의 삶은 다하지 않았으며 여전히 고통 속에서 계속될 것임을 선처해주셨으면 합니다.
- 최 군이 사망하던 날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날 아침 최 군의 아버지는 최 군에 대한 마지막 폭행을 가하고 새로운 직장으로 출근했습니다. 보안업체였는데 대형마트 등으로 인력을 파견하는 회사였습니다. 그는 그날 서울 시내의 모 마트에서 다른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입구를 지켰는데 아들의 안전을 위협한 직후에 그랬습니다. 그는 최 군을 발로 차고 세게 밀었습니다. 발로 차인 순간 5살이었던 최 군의 갈비뼈는 금이 갔습니다. 밀려서 몸이 구르는 동안 상당한 통증이 있었지만 본능적으로 신음소리를 내거나 울면 폭행이 계속된다는 것을 안 최 군은 급히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그 이후로 사망하던 시각까지 10시간 동안 최 군은 상당한 통증에 시달렸는데 우리의 생각보다 최 군은 통증에 익숙해져 있었고 몹시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어떤 큰 행동을 하기에는 가지고 있던 에너지가 너무 부족했습니다. 최 군의 어머니는 당시 며칠 째 집을 비우고 있었는데 집을 나가던 당시에도 최 군의 아버지는 최 군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최 군은 보육시설에 가지 않았습니다. 보육료 때문이었는데 그래서 최 군은 하루 종일 집안에만 있었습니다. 울지도 않았고 부모가 일을 나가면 하루 종일 텔레비전을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배가 고프면 냉장고에 들어있는 빵과 우유를 먹었는데 하루 종일 최 군에게 할당된 빵은 오로지 한 개였으며 우유도 그랬습니다. 사망하던 날 최 군의 어머니는 친구의 집에 가 있었는데 며칠 동안 거기 머물렀습니다. 이따금 최 군의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최 군에 대한 책임감보다는 현실 도피 의지가 더 강했고 무엇보다 남편과의 불화가 극에 달해 있었습니다. 그 해에만 최 군의 아버지는 직장을 일곱 차례나 옮겼고 경제적 무능력과 부부간의 불화로 인한 스트레스를 최 군에게 푸는 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 가볍게 시작한 폭행은 점점 강도가 세졌는데 사망할 즈음에는 성인에 대한 폭력과 다름없는 강도가 되었습니다. 최 군의 아버지가 보통 남성보다 왜소하고 힘이 약한 편이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최 군의 사망은 훨씬 앞당겨졌을 것입니다.
최 군의 갈비뼈에 금이 갔을 때 최 군은 의식을 잃었습니다. 이미 몸에는 여러 군데 타박상이 있었고, 어머니가 집에 돌아오지 않은 다음부터 제대로 된 식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최 군이 의식을 잃자 최 군의 아버지는 일터로 향했는데 최 군이 어제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냉장고가 비어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습니다. 최 군의 아버지는 움직이기는 했지만 최 군과 마찬가지로 의식이 없는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들을 폭행하고 있다는 것과 학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학창 시절부터 그의 분노는 늘 표현되었으나 묵살되었고 오히려 더 큰 폭력과 분노로 돌아왔습니다. 처음으로 그의 분노가 통하는 대상이 생겼는데 그것은 그의 분노에 저항할 수 없는 그의 아이였습니다. 아이는 그의 분노를 온몸으로 맞이해 주었습니다. 처음으로, 그의 부모도 친구들도 동료들도 해주지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 최 군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는 해가 진 직후였습니다.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최 군은 몹시 아팠으며 발열도 있었습니다.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에 온 집을 뒤졌는데 라면이 한 개 있었습니다. 도시가스비를 내지 못했기 때문에 휴대용 가스버너로 식사를 준비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생각한 최 군은 휴대용 가스버너와 성냥까지 찾는 것에 성공했습니다. 최 군의 집에 있던 가스버너의 성능이 좋지 않아 성냥불을 이용해 불을 붙였던 것을 기억해 낸 것입니다. 최 군은 처음에 방 한가운데 버너를 놓고 불을 붙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몇 개의 성냥이 타서 없어지는 동안에도 버너에는 불이 붙지 않았는데 최 군이 가스 밸브를 열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순간 최 군은 생라면이라도 먹을까 생각했는데 그 순간 건너편 집 거실 창문이 보였습니다. 불조차 켜지 않았던 최 군의 집과 대조적으로 건너편 빌라의 거실에는 저녁 밥상을 준비하는 가족들이 분주했습니다. 식탁이 없이 상을 거실 한가운데 놓고 가족들이 마주 앉았는데 반찬은 많지 않았지만 가족들마다 따뜻한 밥과 국이 놓여 있었고, 가운데는 볶은 고기가 놓여 있었습니다. 당시는 겨울이었는데 난방조차 되지 않던 집에서 최 군은 건너편 집의 따뜻한 온기를 목격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만약 최 군이 불을 켜고 있었더라면 건너편 집을 보지 않았더라면 최 군은 생라면을 먹으며 그날을 견뎌 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 군은 건너편 가족의 모습을 보며 어머니가 끓여주던 라면의 온기를 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건너편을 더 잘 보기 위해 휴대용 버너를 창 가까이 옮기고 성냥에 불을 붙였고, 성냥불은 버너 대신 오래된 커튼에 옮겨 붙었습니다. 그리고 불이 번지는 동안 최 군은 멍하니 불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먼저 그 따뜻함이 좋았고, 갈비뼈의 통증 때문에 빨리 움직이거나 소리 지를 수가 없었습니다. 건너편 사람들은 저녁 식사를 하느라 미처 최 군의 몸이 타고 있는 것을 몰랐습니다. 화재경보기는 있었지만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 군은 무사히 사망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저희는 지금 최 군의 처지를 결정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닙니다. 최 군은 이미 다음 생을 준비하기 위해 떠났으며 다음 생에 이르기 전까지 충분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최 군의 시신은 지금 검시 중이며 아마 학대와 폭행의 정황은 밝혀지겠지만 그것인 최 군의 죽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아니므로 그의 부모는 심각한 처벌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변호인 측에서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예전에 '성냥팔이 소녀'의 부모에 대해 너그러운 판결을 내린 적이 있습니다. 소녀의 부모는 소녀의 양육을 포기했으며 그것은 당시 어려웠던 시대의 책임이었고, 소녀의 부모는 그 이후 지속되는 삶에 의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판결 이후 지금까지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많은 '성냥팔이'들이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 우리의 판단이 잘못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최 군의 부모는 앞으로도 살아갈 것입니다. 정확하게 최 군의 아버지는 33년을 최 군의 어머니는 40년을 더 살아가겠죠. 그리고 그들의 삶은 맞습니다, 일종의 처벌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영원히 모르지 않겠습니까. 최 군이 마지막 성냥에 불을 붙이기 전에 보았던 그 가족의 따뜻한 모습을. 그리고 최 군이 자신의 몸이 타오르기 직전 그 따뜻함에 위안받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건을 그렇게 묻어 둔다면 말입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저희에게 33년이나 40년의 시간이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그들의 형량을 정해두고 그들의 죽음 이후에 다시 판결을 내릴 것은 건의합니다. 그리고 그 형량이 그들의 삶에 따라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도 전하고 싶습니다. 그들이 33년이나 40년 후에 재판관님 앞에 섰을 때, 그들에 대한 판결 위에 최 군에 대한 잘못을 덮어 형량을 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들의 삶에 대한 형량 뒤에 최 군에 대한 형량을 이어서 집행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곳 저승의 판결이 이승의 판결과는 다르게 공정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성냥팔이들에게, 죽음 후에라도 공정함과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꼭 알려주셨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