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 세 마리를 포장했다.
시장에 가서 마늘통닭 세 마리를 포장했다.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 6인분도 포장했다.
그리고 집 근처 태권도 도장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아이들과 아이들의 엄마들이 가득이었다. 닭과 떡볶이를 그리고 신용카드와 영수증을 무사히 배달하고 나자,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큰아이는 모처럼 드레스를 입었다.
입학하기 전까지 공주 드레스도 곧잘 입었고 분홍색이 아니면 입지 않으려고 했는데, 요새는 민트색이나 검은색을 즐겨 입게 되었다. 치마는 집에서는 잘 입었는데 학교 갈 때는 청바지나 무난한 복장을 하려고 했다. 치마를 즐겨 입을 때는 의식하지 않았는데 청바지를 입고 학교 가는 모습에 아이가 훌쩍 커 버린 것 같아 조금 서글퍼지기도 했다. 가끔은 한복을 입고 집에서 대장금 놀이를 하는 적이 있는데 그러면 어찌나 반가운지.
그런 딸아이가 이틀 전부터 비록 분홍색은 아니었지만 나름 드레스에 '생일날 입을 옷'이라고 쪽지를 붙여 놓았다. 그리고 드디어 생일을 축하하는 날, 둘째는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이소룡처럼 입고 누나 옆에 붙어 있었다. 무슨 날인지 무슨 일인지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본인의 친구들도 아니고 본인 생일도 아닌데, 누나 옆에만 있으면 호랑이 곁에 여우처럼 당당했다. 누나처럼 생일 축하 모자를 쓰지 못해 서운하다고 때를 썼다는 데, 지금은 그런 기색은 전혀 없었다. 아이들의 성장 동영상을 보고 나서 '어머님들은 앞으로 오세요.' 하는 관장님의 말에 조용히 밖으로 나왔다. 아빠들은 한 명도 없었고, 그런 자리에서 혼자 아빠인 것은 환영받을 수도 비난받을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실상, 오늘은 딸의 생일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는 반 전체가 함께 생일 파티를 개최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큰아이는 10월부터 12월이 생일인 친구들과 함께 두 달이나 미리 축하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둘째는 영문을 모른 채, 누나와 누나 친구들 사이에서 마냥 행복한 중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는 생일을 집에서 했었다. 친한 친구들을 몇 명 부르고, 생일상에는 아이들의 취향과는 관계없는 음식들이 차려졌다. 무엇이든 잘 먹지 않았던 내가 유일하게 관심을 갖는 음식은 어마어마한 버터가 들어간 케이크뿐이었다.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다 함께 놀러 나가곤 했는데, 집에서 음식을 손수 하고 먹이는 일의 번거로움을 생각한다면 정말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늘 동네에서 친한 친구들을 불렀는데, 오래도록 한 동네에서 산 덕에 4학년 때까지의 생일 사진 속에는 같은 남자애들이 조금씩 성장한 얼굴로 찍혀있곤 했다. 나름 행복한 생일이었는데, 4학년 생일 선물로 받은 모형 자동차를 조립하다가 면도칼로 엄지손가락이 너덜너덜하게 상처를 입은 후로는 친구들을 불러 생일을 축하하는 일은 두 번 다시없었다. 손가락이 베였다는 걸 들키게 되면 혼날까 봐 토요일 저녁 밥상 때까지도 헝겊으로 손가락을 감은 채 숨기고 있다가 결국 들켰고, 결국은 더 혼났다. 그리고 병원에 갈 시간을 훌쩍 넘긴 덕에 병원 치료를 제때 받지 못했다. 이 사건이 내 생일에 대한 어린 시절 마지막 추억이었다.
큰아이가 돌일 때는 장소를 빌리고 식사를 예약하고 손님을 초대하고 사진을 찍고 법석을 떨었다. 화려했지만 머리숱도 없는 아이를 드레스와 한복을 입혀 사진을 찍고 난리를 치르느라, 낮잠도 제대로 재우지 못했고, 결국 적자만 남기면서 끝났다. 나름 의미는 있었던 것 같았다. 단지 기대와는 달랐던 것뿐.
작은 아이의 경우에는 공식적으로 돌잔치를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직장은 제주시였고, 우리가 사는 곳은 서귀포였으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귀찮게 해야 하는 당위성을 우리 스스로 찾기 힘들었다. 그래서 음식을 준비하고 잔치상을 빌려 집에서 사진을 찍고 주변에 정말 가까운 사람들과 식사를 하는 정도로 마무리했다. 예쁜 사진도 화려한 돌잡이도 없었지만 중간에 아내와 아기를 충분히 쉴 수 있었고, 이동의 번거로움도 없었다.
그래서인지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상당히 복잡했고, 번거로웠지만 딸의 8살 생일잔치는 끝났다. 생일 선물을 풀어보느라 상기된 큰아이와 덩달아 본인의 선물도 아니었지만 선물을 풀어보는 둘째의 모습, 결국 모두 웃으면서 하루를 마감했으므로 그것으로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은 형식의 문제도, 비용의 문제도 아니었다. 우리 가족이 모두 모여 선물을 열어 보는 이 순간이 더 중요한 것이었다. 내년에는 아마도 친한 아이들만 불러 생일을 축하하겠지만 한 번 정도는 학급 아이들 모두의 축하를 받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아내는 지쳐 쓰러져 있지만.
그리고 언젠가는 아이들이 자신의 생일을 친구들과 혹은 이성친구와 축하하려고 집 밖에서 보내는 날이 올 것이다. 조금 화가 날 수도 있을 것이고, 서운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지금 이렇게 함께 모여 있는 시간을 꼭 기억하면서 화를 참아야 할 것이다. 아이들에게 그때 자신의 생일을 축하받고 싶은 사람이 우리가 아니더라도 그때는 그때의 방식대로 행복하면 될 것이다.
오늘 우리 딸의 장래희망이 개그맨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커피전문점 아르바이트도 하고 싶다는 말은 애써 못 들은 척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개그맨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은 책을 세 권 선물 받았다. 하지만 딸은 전혀 슬퍼하지 않고 기분 좋아했고, 작은아이는 작은 레고를 하나 선물 받았으며, 크게 만족해했다. 두 아이는 클레이로 태양계를 만들며 저녁 시간을 보냈고 날씨는 아이들이 만든 태양만큼 맑았다. 우리는 모처럼 아무 의구심 없이 행복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