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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호미 Jan 15. 2024

동네 개, 흰둥이 이야기

행복한 개는 누구일까


나에겐 부끄러운 기억이 있다. 내가 유치원을 다니던 즈음의 기억이다. 우리 집 마당에서 키우던 개가 새끼를 낳은 건지, 동네 개가 낳은 새끼를 데려온 건지 자세한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집에 작고 하얀 강아지가 생겼다. 아빠가 강아지를 소중하게 들고 와선 우리 자매에게 보여주었는데, 정말 귀엽고 예쁜 녀석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 흰둥이가 커지면 다른 개들처럼 마당에 묶이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나는 튼튼한 줄을 구해 흰둥이 목에 길게 묶었다. 어린 나는 흰둥이에게 자유를 맛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다. 묶여 있는 것보다 나은 건 목줄을 하더라도 산책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흰둥이를 안아 밖으로 나갔다. 본격적으로 산책을 하기 위해 흰둥이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내 마음과 달리 모든 게 두렵기만 했던 흰둥이는 몸을 잔뜩 움츠리며 움직이지 않았다. 개의 몸짓을 이해할리 없었던 나는 줄을 잡아당겼고, 흰둥이는 무개 중심을 엉덩이에 둔 채로 주춤거렸다. 그런 모습을 긍정적인 신호로 인지했던 건지 나는 줄을 당기며 십여 미터를 걸었던 것 같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나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흰둥이가 걸어온 길 뒤로 핏자국이 선명했기 때문이었다. 겁이 많은 녀석은 걸어오지 못하고 내 힘에 끌려왔고, 연약한 발바닥이 길에 긁혀 상처를 입은 것이었다. 그 이후에 기억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때 받았던 충격은 아직까지도 생생하다. 흰둥이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생각 때문에 오랜 기간 죄책감을 떨치기 어려웠다. (혹시 내가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진지하게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난 원래 개들을 귀여워하긴 했지만, 초롱이를 만난 이후론 개를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달라졌다. 개들이 본능적으로 사용하는 카밍시그널(몸짓 언어)을 보며 그들의 상태를 알아차리기도 하고, 짖는 소리만으로 반가운 건지 두려운 건지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개마다 생김새도 성격도 사연도 모두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러자 지나가다 만나는 모든 개가 새롭고 귀여워졌다. 



한때는 초롱이가 내게 주는 사랑에 취해서 사람보다 개가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모든 개는 '사랑'이라고, 모든 개는 최대로 사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험상 이런 상태는 주의가 필요하다. 개에게 집중하는 바람에 사람이 가진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상황을 간과하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지나가다 만나는 보호자들이 반려견을 대하는 아주 작은 면을 보고 판단과 비난을 일삼게 된다. 유튜브에 올라온 편집 영상을 보고 양육 방식에 대한 간섭 댓글을 달게 된다. 물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거나 반려견의 건강을 위협하는 양육 방식은 마땅히 교정되어야 하겠지만, 나는 내가 좋은 보호자라는 우월감에 사로잡혀 (또는 스스로를 속이기 위해) 다른 보호자를 쉽게 비난했던 시절을 후회하고 있다. 그리고 동네 개였던 흰둥이는 내게 그런 변화를 준 녀석이었다.




서울로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동네를 혼자 배회하는 흰둥이를 만났다. 내가 임의로 이름 붙인 흰둥이는 목줄 없이 항상 혼자서 동네를 돌아다녔고 아무 곳에서나 배변을 했다. 처음엔 유기견이라고 생각할 만큼 털이 떡지고 엉켜 있었다. 혹시 길을 잃은 거라면 동물 병원에 데려가 칩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잡아보려고도 했지만, 사람에 대한 경계가 심한 녀석이라 쉽지 않았다. 그래도 지켜보니 응가를 보면 사료를 배불리 먹은 티가 났고, 날이 추워지면 핑크색 옷을 입고 다녀서 보호자가 따로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양이로치면 산책냥이처럼 안팎을 자유롭게 오가는 방임형 반려견이겠구나 싶었다.


나는 목줄이 풀린 개에게 물린 적이 있었고, 초롱이는 다른 개에 대한 경계심이 강했으므로 처음엔 흰둥이의 존재가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공격적인 성향은 전혀 없는 녀석이어서 초롱이에게 순수한 호기심을 지닌 채로, 조심스럽게 다가왔기에 시간이 지날수록 나도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차와 오토바이가 수시로 다니는 골목을 아슬아슬하게 걷는 흰둥이를 볼 때마다 마음속으로 흰둥이를 내버려 두는 보호자를 비난했다. 게다가 흰둥이가 아무 데나 배변하는 바람에 피해를 보는 주민들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초롱이는 흰둥이가 좋았다. 흰둥이는 항상 초롱이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뒤를 따랐다. 모든 개를 싫어하는 초롱이도 흰둥이가 자기를 따라다니기 시작한 지 2년 만에 마음을 열었다. 둘은 종종 골목에서 만나 서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보통은 멀리서 초롱이를 먼저 발견한 흰둥이가 다가와 인사를 했다. 흰둥이가 나에겐 가깝게 다가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 안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해 주는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다. 


서로를 반가워하던 초롱이와 흰둥이


그날도 여느 날처럼 동네 골목에서 흰둥이를 만났다. 흰둥이는 평소와 다르게 나와 초롱이를 본체만체했고, 어딘가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문 앞에서 고개를 내밀고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 같았다. 나는 그런 모습이 의아해 걸음을 늦춰 흰둥이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골목 아래서 누군가 '백구야!'라고 외쳤다. 그러자 흰둥이는 골목을 신나게 달려 내려갔다. 흰둥이가 향한 곳에는 폐지를 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올라오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내가 흰둥이라고 불렀던 백구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미소, 할아버지를 맞는 백구의 신난 몸짓을 나는 멍하니 바라봤다. 나는 그 둘의 재회를 바라보며 아름답다고 느꼈다. 녀석은 할아버지에게 사랑받고 있었고, 백구도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있었다. 나와 초롱이가 그렇듯이. 폐지를 가득 실은 수레를 힘겹게 끌고 올라오는 할아버지와 백구를 보며 나는 왜인지 모를 부끄러움을 느꼈다. 




어린 내가 강아지를 억지로 끌고 다니며 개 발바닥에 피를 나게 했던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부모에게 교육을 잘못 받은 못된 아이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의 모습만 본다면 말이다. 나는 20대 초반, 식당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며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을 보면 쉽게 얼굴을 찌푸리며 부모를 향해 혀를 찼다. 활동적인 아이의 행동을 통제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로선 알 수 없었다. 백구를 풀어둬서 위험하게 골목을 누비고 아무 곳에나 배변을 하게 하는 보호자를 비난했다. 할아버지가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더 이상 나는 그를 비난하기가 어려워졌다. 어린 나에게도 나름의 이유가 있었듯 할아버지의 이유도 있었을 것이기에. 


그리고 분명한 건 내가 그날 목격한 할아버지와 백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경포호를 감상하는 초롱이와 나


+백구를 길에서 못 본 지 1년이 넘었다. 백구는 이사를 간 걸까, 무지개다리를 건넌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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