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86. 약속할 수 있는 것-행동은 약속할 수 있으나 감정은 약속할 수 없다 ; 왜냐하면 감정은 의지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을 항상 사랑하겠다거나 미워하겠다거나, 항상 그에게 충실하겠다고 약속하는 사람은 자신의 힘이 미치치 못하는 것을 약속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언제까지나 사랑하겠다는 약속은...... ;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더라도, 다른 동기에 의해서일지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가상이 상대방의 머릿속에는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책세상, 2019. p.86)
나는 어린 시절, 순정만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영원한 사랑 이야기에 깊이 매료되곤 했다. “영원히 너만을 사랑해”, “죽는 날까지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와 같은 맹세는 왠지 모르게 가슴 벅찬 감동을 선사했고, 사랑은 마치 변치 않는 별처럼 영원한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직간접적으로나마 경험하면서, ‘영원한 사랑’이라는 단어는 아름다운 환상인 동시에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우리의 의지는 특정한 행동을 선택하고 지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지만, 수시로 변화하는 감정은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다.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하겠다”거나 “영원히 너에게 충실하겠다”는 맹세는 간절한 바람을 담고 있을지는 모르지만, 실질적으로는 자신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약속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행위는 마치 “내일 아침 해는 반드시 붉게 떠오를 것이다”라고 단언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간절한 바람과는 별개로 자연의 섭리에 따라 변화하는 감정의 속성을 간과하는 것일 수 있다.
영화 ‘봄날은 간다’를 처음 보았을 때, 순수한 사랑을 갈구하는 철규의 모습에 깊이 공감했던 기억이 난다. 반면, 그의 변치 않는 사랑을 당연하게 여기고 결국 떠나가는 은수의 모습은 어린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그 영화를 보니, 철규의 맹목적인 믿음이 어쩌면 현실과는 동떨어진 이상을 좇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느껴진다. ‘사랑은 영원하다’는 아름다운 말 뒤에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간의 감정과 예측 불가능한 현실이라는 냉정한 벽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사랑의 유효기간 3년’이라는 속설처럼, 사랑이라는 감정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할 수 있으며, 그러한 변화는 자연스러운 인간의 심리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변덕스러운 감정 앞에서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사랑의 변화를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일까? 니체는 영원한 사랑이라는 덧없는 가상에 매달리기보다는, 사랑의 본질을 ‘약속’이 아닌 ‘증명’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한 나는 너에게 사랑의 행위를 입증할 것이다.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게 되더라도, 다른 동기에 의해서일지라도 나는 똑같은 행동을 너에게 보여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언제까지나 똑같은 것이라고 하는 가상이 상대방의 머릿속에는 존속하고 있는 셈이다.” 그의 말처럼, 사랑의 감정 자체가 영원불변할 것이라는 믿음에 기대기보다는, 현재의 감정에 충실하여 상대를 위한 작은 노력과 배려를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화려한 언어나 감미로운 맹세는 순간적인 감동을 선사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결국 희미해지기 마련이다. 변덕스러운 감정에 기대어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보다는, 매일매일의 소소한 행동과 진심 어린 마음을 표현하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변치 않는 믿음을 심어주고 관계를 지속시키는 진정한 힘이 될 수 있다.
사랑은 약속이 아니라, 매 순간을 함께하는 노력과 헌신으로 증명해나가는 현재 진행형의 감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