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눈, 엽서
그렇게 쌓아둔 엽서가 벌써 수십 개의 산더미를 이뤘던 터라 이것들을 정리하는 데에 거진 이틀인가 나흘이나 걸렸던가.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모든 엽서에서 받는 이는 적혀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당사자에게 갈 일이 없기 때문이다.
내용이 낯부끄럽거나 부담이 돼서라든가 그런 건 요즈음에는 당연한 거라 딱히 신경 쓰고 있지 않은 부분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들을 가방에 쑤셔 넣고선 코트 하나만 걸치고 눈이 와서 새하얀 거리를 여느 때와 같이 산책하듯이 거닐었다.
오늘따라 하늘까지 구름 한 점 없고 푸른 색감 하나 없이 그저 새하얗기만 해서 온 세상이 눈으로 잠식된 듯이 시야가 확 트인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돼서야 겨울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말도 안 될 걱정거리에 한껏 슬픈 표정을 지어보았지만 지나가는 사람에게 동정 어린 시선만 받을 뿐이었다.
그렇게 계속 정처 없이 길거리를 걷고 있다가 고개를 들어 정신 차리고 보니 빨간 우편함 앞에 서있었다. 슬펐던 표정이 이내 쓴 웃음으로 바뀌고 헛웃음으로 바뀌어 나는 가방에서 그것을 꺼내어 우편함에 여유롭게 넣고 또 넣었다.
아무 생각 없이 그러고 있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아, 이 엽서, 이 편지는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걸까. 발신지도, 보내는 이도, 뭣도 없을 텐데. 혹시 다 파기되어 산산조각난 종이 쪼가리가 되는 게 아닐까. 그런 걱정이 또 들어서 한숨을 푹 내쉬니 입김이 나오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니 자신이 숨을 쉰다는 것을 새삼스레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우편함에 그것들을 다 넣고 나서 또다시 정처 없이 거리를 걸어 보았다.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오랜만에 집을 나온 터라 왠지 모르게 집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다가 나는 어느 시계방 앞에 도착해 있었던가. 그곳에는 늙은 주인이 있었는데 처음 손목시계를 샀을 때(그러고 보니 그때가 처음 이곳을 들렀을 때였다.) 실례를 뵈었던 적이 있다. 잘 계실는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나답지 않다고 생각이 들어서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때부터 나는 눈을 감은 채 거리를 걸어보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와 부딪힐 뻔 했다가 험상 궃게 생긴 사내와 부딪힐 뻔 했다가 장을 보다 온 건지 짐이 한 가득인 노부인과 부딪힐 뻔 했다. 그럼에도 나는 계속 눈을 감고 맹인 행세를 했다. 나도 참 짓궃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눈을 떠보니 한 앙상한 나무가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나무에는 눈이 소복히 쌓여 있었다. 마치 크리스마스 트리가 따로 없다고 생각했다. 또, 이 겨울이 나무에게는, 나에게는 이토록 차디 차고 외로운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나무를 껴안아 보았다.
적어도 나무는 나보단 굳고 정했다. 또한, 굵기도 튼실해서 참 안심이 됐다. 아무런 온기가 느껴지지 않아야 할 터인데 괜히 따스한 온기가 내 속에서는 느껴지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시선을 나무의 다른 곳으로 옮겨 보았다. 나무의 한 가지가 어찌 된 일인지 부러진 것을 보았다.
나는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그것에다가 묶어주었다. 이것이 동정과 연민이라는 것을 느끼고 나는 다시 쓴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 나무 아래 옆에 기대어 눈을 감아본다.
*
눈이 온 거리는 한기가 지독하게 가득 차 있었던 터라 극도의 추위를 느끼고 덜덜 떨면서도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그곳에서 한참을 쭈그려 앉아서 한파 속에서 정신이 혼미해질 때까지 제가 밟고 온 눈길을 하나씩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눈에는 뜨거운 것이 핑 돌아 마지못해 터져 흐르는 것이 느껴졌을 때는 저녁인지도 밤인지도 모를 시간대였다. 나는 그날 홀로 외로이 집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버렸다. 다음 날에는 심한 감기에 걸려 또 혼자 끙끙 앓다가 고열에 시달리느라 애를 먹었다.
찾아오는 이 하나 없고 연락 오는 이조차 하나도 없어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아프면서까지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얼굴이 새빨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건 분명 열 때문이 아니었다. 어찌 됐든, 나는 병마에 시달리다가 최근에는 좀처럼 꾸지 않던 꿈도 꾸게 되는 것이었다.
*
나는 외투의 옷 자락을 휘날리며 이 도시의 밤 거리를 유유히 걸었다. 묵묵히 걸어 도착한 곳이 없어야 할 터이지만 나는 이유도 모르는데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만 했기에 몇 십 년을 이곳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낡은 빌라의 무리 안으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갔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서니 마치 고향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새삼스럽게.
2022년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