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에는 나 자신으로 돌아오는 나이
오늘은 날씨가 제법 선선하다. 날이 흐리고, 비가 오고, 저녁이 되니까 가을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가 이 저녁, 이 밤에 울려퍼진다. 역시 소나기 한 번 지나가고 안 가고 이 무더웠던 여름의 막을 내리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이제 곧 9월이다. 슬슬 2학기 개강을 앞두고 나는 기숙사 입실 준비로 분주하다. 이번에는 소설 책 몇 권을 들고 갈 생각이다. 소설 책 말고도 릴케의 시집도 들고 갈까 생각 중이다. 시집은 꼭 릴케의 시집이 아니어도 된다. 나카하라 추야의 시집이어도 상관없을 것이다.
소설 책은 당연고 <노르웨이의 숲>과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책을 들고 갈 예정이다. 아, 참.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도 들고 갈 생각이었다.
이번 학기에는 전공에도 문학을 배우고, 교양도 거의 글쓰기, 문학과 관련된 과목이라서 평소에 즐기는 책을 들고 가면 안심이 될 것만 같다.
갑작스럽지만, 나는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즈음부터 계획하는 것을 굉장히 좋아했다. 그 계획이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더라도 내 계획에 무언가 문제점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학년이 올라갈 수록 나의 계획 방법은 더욱 자세해지고 현실적으로 변해갔는데, 고등학교를 갓 입학한 1학년 시절 무렵일 때 학습 계획을 세우면서 나의 계획 방식은 큰 변화를 겪었다. 그 이유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 선생님께서 매주마다 학습 플래너를 검사하셨기에 평소에 자신이 그런 걸 쓰지 않았어도 이를 제출해야만 했기에 무조건 쓸 수밖에 없었고, 이는 학습 영향에도 당연히 자연스레 미치게 되었다.
사람은 자신의 말에 막중한 책임을 가지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런 심리가 계획을 실천하는 데에 분명히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양심의 문제였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면, 자신의 실수나 잘못도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문제점을 처리해야 하는 능력이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내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방어의 일종인 문제였고 나는 나의 실수나 잘못을 빠르게 인정하고 문제점을 고치려고 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그 사실을 안 이후로 나는 양도 많고 탈도 많았던 걱정을 조금씩 덜어내려고 마음 먹었다. 여러 계획을 세워보고, 문제점을 깨닫고 고쳐나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그리 걸리지 않았다. 실천을 하는 게 언제나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계획이 흐트러지면 저 계획으로 한번 해보는 것을 반복했다.
그 이후로 나의 삶은 아파서 그런 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불안에 떨지 않는 법을 터득한 것만 같아서 그 사실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심지어 옆에서 응원을 해주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에 나는 유유히 걸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이 사랑의 올바른 힘이 아닐까, 하고 괜히 자기 합리화를 해본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지혜와 현명함, 그리고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고, 진실이 이겨야 진심이 통하기 때문이다.
계획적인 사랑이랄까, 준비된 사랑인 것이다. “노르웨이의 숲”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나이 때는 처음으로 생각해낸 주제에서 사랑을 하고 있는 상태에서도 결국 자신이라는 주제로 돌아온다고 말한다. 그 말을 지금은 이해할 듯 말 듯한 게 당연한 이치이리라. 스무 살, 청춘, 사랑은 낭만적인 한 편의 영화처럼 남겠지.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며, 미화되려나.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을 하고 글을 줄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