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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雪(첫 눈)

2025년 2월 7일 금요일 기록

by 한월 Feb 08. 2025

최근 뇌전증 증상으로 신경과를 방문하게 되었다. 뇌전증, 옛말로 하면 간질. 작년부터 조짐이 보였던 것 같다. 대학교 입학 전까지만 해도 이런 일이 없었는데 입학 후에는 가끔 자다가 발작을 일으키는 증상이 생긴 것 같다. 학기 중에는 타지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니까 잘 몰랐지만 아마도 이런 일이 조금씩 있었던 것 같다. 왜 계속 이렇게 추측성 어조로 이야기하냐면 나는 발작이 일어났던 걸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올해 들어 그 증상이 뚜렷하게 나타난 것 같은데 가장 최근에는 두 번이었다. 한 번은 과음을 한 날이었는데, 내가 자다가 눈을 뜨고 몸은 뻣뻣하게 굳어가지곤 입에서는 거품과 함께 혀를 깨물어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서 일어나보니 속이 너무 안 좋아서 토를 몇 번이고 했다. 두 번째 때는 과식을 한 날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 때도 자다가 눈을 뜨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서는 입에서는 거품이 나오고 또 혀를 깨물어서 피가 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또 정신을 차리면 몇 번이고 화장실에 가서 토를 했다.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전부 일어나면 내가 그랬었는지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리를 하자면 이렇다. 자다가 발생한 일이라는 것, 눈을 뜨고 몸이 뻣뻣하게 굳어선 입에 거품을 물고 혀를 깨문다는 것, 정신을 차려보면 기억이 없다는 것. 또, 그러고 나면 항상 머리가 어지럽고 아파서 토를 했다는 것. 어쩌면 과음이나 과식 증상 때문에 그랬던 거라고 넘어간 것이었지만 사실은 뇌에 문제가 있어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어째서인지 소름이 끼친다. 


어쨌든, 위와 같은 뇌전증 증상으로 신경과를 찾았는데 혈압을 재고 자율신경 검사와 채혈 등을 했다. 혈액 검사 결과는 시간이 걸린다고 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나왔고 나머지 검사들은 바로 결과가 나왔는데, 확실히 어딘가 문제가 있다면서 큰 병원(대학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들었다. (참고로 혈액 검사는 모든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다.)


그래서 그날 신경과에서 받은 진료 진단서를 들고 대학 병원을 찾았는데 뇌전증이 확실하지만 자세한 건 뇌 mri와 뇌파 검사 등을 받아봐야지 알 수 있다고 다음주에 1박 2일 동안 입원을 하며 한꺼번에 검사를 받자고 했다. 하지만 당연히 우리 집안 형편으로는 너무나도 부담스럽고 막막했다. 아직 얼마가 나올지 알 수가 없지만 당연히 대학 병원이고 뇌에 이상이 있는 한 비용이 결코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우리 집안 형편을 잘 알고 있기에 부모님 눈치가 보였다. 가난하면 아픈 것도 마음대로 못 한다. 


나와 어머니는 아버지 눈치가 보여서 아무런 이야기도 못했다. 어떻게든 상의를 해야 하는데 아버지는 내가 아픈 이유가 나약한 정신과 신체 때문이라고만 탓한다. 게다가 나의 전생이 비참해서 이런 일을 겪고 있는 것이라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인다. 나처럼 나약한 인간은 미토콘드리아가 부족해서 멍청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무슨 말인지 얕은 지식으로 나를 재려고 든다. 도대체 미토콘드리아랑 나의 뇌전증이랑 무슨 상관일까. (참고로 미토콘드리아는 세포 속 작은 기관이다.) 나의 뇌전증은 선천적인 것이 아니고 후천적으로 자연스레 발생한 건데 관련없는 지식으로 공부했다고 말하는 아버지가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자신의 말을 들으면 피와 살이 되고, 좋은 걸 알려주면 고맙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말에 토달지 말고 그냥 들으란다. 


이럴 거면 병원 진료를 받으라고 하지 말지. 막상 아프다고 하니까 이상한 소리만 내뱉는다. 사실 생각해보면 놀랍지도 않다. 아버지는 내가 발작 증세가 있었을 때를 보고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옆에서 걱정하고 조치를 취한 건 어머니 뿐이었다. 뭔가 이상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믿고 싶지 않은 건지, 경각심이 없는 건지 모르겠다. 두 가지 이유 전부일 것 같긴 한데, 대충 이해는 간다. 막대한 비용 때문에 믿고 싶지 않은 건 둘째 치고, 경각심이 없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솔직히 알고 싶지도 않다. 자식이 아프니까 속상해서, 믿고 싶지 않은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그런 건 부모로서 실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 나는 부모가 돼 보지 않아서 막말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니까 내 말에 토달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내가 배운 거라곤 이런 것뿐이다. 


막말로 내가 제대로 검사도 받지 않고 치료도 안 해서 죽게 된다면 후회하는 건 부모 쪽이다. 그러니 나는 통쾌한 셈이다. 오늘은 눈이 내린 날이다. 아마도 첫눈일 것이다. 입춘이 지나서 온 첫눈은 꽃샘추위에 피어난 꽃의 흩날리는 잎사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 어른이 되지 않아도 좋다. 당신이 시험삼아 쳤던 존엄성과 완전히 무시했던 순수한 마음 전부 그 모습 그대로 있을 테니까. 내가 태어난 봄에 피어날 첫 꽃은 애증의 꽃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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