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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너라도 좋아

사랑하는 연인에게.

by 한월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너라도 좋아. 지고지순한 너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아서 그래. 그건 나도 매한가지고. 그러니까 제발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로 밝고 더럽혀지지 않은 모습으로 있어줘. 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에 대해서는 잘 안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너도 나만큼 못지 않게 그렇게 쉽지 않은 말을 남발하니까. 사랑이라든가 결혼이라든가. 동거하는 일상을 바라는 것도 나는 조금 씁쓸했어. 결혼할 사이도 아닌데 어떻게 동거를 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고, 만약 그 동거가 결혼을 전제로 한다고 해도 우리는 아직 그런 이야기를 할 나이가 아니야.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너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고 했잖아. 그건 당연한 거야. 나의 눈치를 굳이 보면서까지 나와 그런 미래를 꿈꾼다고 말하는 건 안될 짓이야. 네가 가끔 당연한 듯 말하는 게 나에게는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아. 그런 미래는 꿈꾸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는 아직 젊고 시간이 많아. 그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 미래는 우리, 다음 다른 세계로 넘겨서 남겨 두자.


결혼? 그런 거 못할 것도 없지. 그래, 맞아. 동거? 그런 것도 못할 것도 없어. 하지만 그런 건 나중으로 남겨 두는 게 어떻겠어? 너에게 있어서 나는 처음이야. 그렇지? 너의 처음을 함께 해서 좋았고 또, 행복했지. 너의 처음을 내가 가져가서 또 행복했지. 하지만 처음을 함께 했다고 해서 마지막까지 함께일 필요는 굳이 없단다. 그러면 너는 마지막도 처음이니까 나에게 모든 처음을 함께 해달라고 하려나. 설마, 낙천적이고 자유로운 네가 그런 대답을 할까?


우연찮게도 어제 내가 우려했던 것을 오늘 네가 간접적으로 말했어.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어. 미래에 대해서는 확신이 서지 않는 모습만으로도 정말 다행이었어. 나는 보다시피 평범하지 않아. 건강하지도 않고. 뇌전증에다가 우울증, 불안장애, 공황장애, ADHD 등 여러 가지로 하자가 많은 인간이니까. 너는 한번이라도 망설였을까? 안 해봤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망설여 보렴. 이 사람과 미래를 함께 해도 나는 정말 괜찮을지. 사랑만으로 안 되는 것도 있다는 걸 생각해보기도 하고. 몇 번이고 고민해보렴. 나는 널 따지지도, 따질 것도 없지만 너는 날 한번은 따져봐야 된단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나는 온전치 않은 사람이니까. 그래도 이렇게 말하는 것도 순화된 거지.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렵다고 생각할 정도였는데 사람이라고 굳이 선택했지. 너를 위해서 말이야. 지금도 너를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이 말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 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기에 나만 간직하고 있을게. 이 글을 너에게 전하면, 지금 좋은 관계를 망쳐버릴 게 뻔하니까. 지금 좋은 관계인데 괜히 이런 말을 하는 건 너에게 헤어지자며 널 설득하는 것으로밖에 안 보일 테니까.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어.


가끔 나는 생각하곤 해. 우리가 정말 순애하고 있는 걸까?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고 있는 걸까? 네가 처음이라서 그렇게 느껴지는 건 아닐까? 나도 이런 경험은 처음이지만 나는 가끔 의심을 해봐.


그리고 지금까지 너는 분명 나에게 있어서는 일생 중에 가장 보석 같은 사람이야. 왜냐하면 나는 쭉 혼자였거든.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아무리 부모님이 있다고 해도, 친구들이 있다고 해도 결국에는 내가 혼자 남겨지는 시간이 많았는 걸. 물론 너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래도 참 기뻤어. 나에게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준 게. 네가 떠나기 전 밤마다 멀리서도 내 곁을 지켜봐줬던 걸 늘 고마워하고 있어.


오늘 내가 기운이 없어 보였던 건 괴롭고 힘든 것도 조금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지만, 분명한 건 너의 말이 왠지 모르게 나를 씁쓸하게 만들었다는 거지. 특별한 말도 아니었지만. 그저 농담이겠지 하며 바라고 있어도 속으로는 나도 그런 미래를 그리고 있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미안해. 너를 나라는 감옥 속에 가둬둔 것 같아서. 언젠가 너도 나에게서 벗어나고 떠나서 무수히 많은 경험을 하게 되겠지. 나도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최대한 올바른 생활에 정직한 일을 하면서 살려고 노력해.


너는 언젠가 이 반지도 잃게 되겠지. 그날까지 우리 잘 지내보자. 내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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