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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마일한문샘 Dec 25. 2023

성탄 선물

1998년 여름은 뜨거운 터널이었습니다. 한문선생님께서 뇌출혈이시다, ㅇ병원에 계시다, 학교에서 너무 일이 많으셨다...... 작년에 선생님 반이었던 교회 동생이 들려준 이야기에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언니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았어."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도 울먹울먹. 그날 밤늦게까지 일기장을 채웠습니다. 거의 매일 선생님 이야기를 썼습니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그저 막막하고 어두운 나날이었습니다.


8월 중순, 5월에 다쳐 깁스한 발목이 다 나을 즈음 선생님 댁에 조심스레 전화를 드렸습니다. '사모님께 여쭤 보고 문병 가야지' 했는데 "ㅇㅇ이니?" "선생님!" "많이 좋아져 오늘 퇴원했어. 하나님 은혜지!" 따스하고 빠른 어조로 무엇보다 건강이 가장 소중하다고, 지금까진 몸을 돌보지 않고 무리하셨지만 이제부턴 이런 일이 안 생기도록 해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대로 하나님 안에서 열심히 공부하며 살아가렴."


12월 24일. 방학이라 방 정리하고 오후 1시쯤 학교 가려는데, 뒷문으로 가는 길에 미색 봉투가 보입니다. '뭘까?' 뒤집어 보니 선생님 글씨! 파카 펜으로 정성들여 쓰신 글씨에 두근두근 덜컹덜컹. 지하철에서 자리 잡자마자 봉투를 열었습니다. 《오늘의 양식》 1999년 1월호, 편찮으셔선지 살짝 흔들리지만 반듯하고 다정한 글씨. 그 말씀 고이 담아 학교에서 공부하고, 오는 길에 서점에서 《6차 고등학교 교육과정 해설-한문》을 샀습니다.


눈 오는 성탄절. 조금 일찍 일어나 책상에 앉았습니다. 성경 읽다 찾아오는 기억에 카드와 《오늘의 양식》, 그해 7월부터 12월까지 빼곡하게 쓴 일기를 읽었습니다. 자주 앓고 번민하며 교육심리 F학점처럼 내려앉던 나날이었기에 성탄 전날 받은 말씀이 더더욱 반짝였습니다. 어느새 그때 그 시간보다 더 많은 날을 어른으로 살아내며 새해를 준비하는 요즘, 오랜 편지와 일기 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고 가다듬는 아침은 또 다른 성탄 선물입니다.

* 사진은 선생님께서 보내신 책과 카드, 1998년 10월 27일(화) 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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