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4.20. ~ 2019.4.25
2019.4.20.(토)
-<겨울의 눈빛>, 박솔뫼
<라스트 러브 송>, 김봉곤
직장인이 되어 가장 절실히 느끼는 것은 역시 만사의 근원이 ‘체력’이라는 점이다. 일할 때는 물론이고, 일로 소진된 후의 일상을 건강하게 보내는 데에도 체력이 필요하다. 영화를 보는 것에도 체력이, 저녁 약속을 잡고 친구를 만나는 데에도 체력이, 독서를 할 때도 체력이 필요하다. “체력이 국력”인지는 잘 모르겠고 관심도 없지만, 적어도 한 사람의 삶을 좌우하는 근본 요인임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하루 종일 일을 한 자의 몸과 마음이 방금 닦은 유리창처럼 깨끗할 수는 없는 법이다. 신체와 영혼이 극히 말라 있는 상태일 땐, 그러나 어딘가 그냥 잠들기 헛헛할 땐, 주로 소설을 잡아든다.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실으면 없던 집중력도 어느 정도 되살아난다. 단어와 문장을 곱씹으며 나만의 사유를 펼쳐나가야 하는 책들은 그럴 때는 읽기 어렵고, 읽더라도 머리를 튕겨져 나오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진다. 물론 모든 소설이 내 몸만 실으면 되는, 즉각적인 집중 상태로 나를 이끄는 것은 아니다. 우연히 컨디션 최저점일 때 읽었던 두 편의 단편소설이 그 사실을 새삼 상기시켜 주었다. 소설가 박솔뫼의 <겨울의 눈빛>, 그리고 소설가 김봉곤의 <라스트 러브 송>이 그것이다. 얼핏 공통점이 많지 않은데, 어쩌다 보니 연달아 접하게 되었다. 두 편 모두 일인칭 화자가 독백을 하는 것만 같은 문장들이었는데, 어제의 나는 좀처럼 그 흐름을 따라가지 못했다. 여러 차례 책을 덮었다 다시 폈다. 이런 상황에 처했을 때 독자는 두 가지 부류로 나뉜다. 일단 어떻게든 편 자리에서 일독을 하고 보자는 ‘완독파’와, 지금은 후퇴하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줄행랑파’가 그것이다. 평소의 나는 완독파에 가깝지만, 어제는 부득이하게 책에서 후퇴해야 했다. 오늘, 여러모로 어제보다는 조금 나아진 상태로 다시 읽어보니 ‘그 정도로 읽기가 어려웠나?’ 싶다. 의식의 흐름을 섬세히 묘사하는 소설은 사건 중심으로, 혹은 인물 간의 대화 중심으로 전개되는 소설들과는 또 다른 맛이 있다. 정말로 독서에도 체력이 필요하다. 요즘 책이 잘 읽히지 않는다면 무엇보다 우선 나의 심신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그 다음이 심신 상태에 알맞은 책 선택. 어제는 아무래도 <셜록 홈즈> 시리즈 같은 책을 다시 읽었어야 했나보다.
2019.4.21.(일)
-<시련>(2019), 동국대학교 이해랑예술극장
-<시련>, 아서 밀러
좋은 연극을 보면 대본을 읽어보고 싶어진다. 최근에는 <에쿠우스>가 그랬고, <레드>도 그랬다. <레드>의 경우 정식 출판된 번역본 대본이 없어 영문판을 샀다. 그러나 가장 최근에 본 연극인 <시련>은 조금 다른 경우다. 앞서 언급한 연극들을 보고 난 후 느낀 강렬한 희열이 없었다. 대신 머리가 아팠다. 이때의 ‘머리가 아팠다’는 상투적 표현이 아니라 사실을 쓴 것이다. 연극이 끝나자마자 객석을 빠져나와 진통제 두 알을 삼켜야 했다. 우선은 컨디션이 좋지 않았고, 그 다음으로는 극의 긴장감과 배우들의 열연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그러면서도 명확하게 와 닿지 않는 부분들이 있어 커튼콜이 끝난 후에도 뭔가 석연치 않았던 것들에 대해 계속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은 재관람을 하거나, 혹은 대본을 직접 읽어보는 것이다. 나는 곧 아서 밀러의 <시련>을 구매했다. 연극을 다시 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17세기 미국의 세일럼 마을에 닥친 마녀사냥의 광풍을 다루고 있다. 얼핏 종교적 문제의 외피를 둘러쓴 이 이야기는 그러나 그 속내에 다른 문제들, 이를테면 마을 사람들 간의 탐욕에서 비롯된 갈등, 혹은 그 무게에 비해 한없이 가벼운 지혜로 생명을 좌지우지하는 공권력의 문제 등을 품고 있다. 작가는 이를 굳이 감추려 들지 않고 인물들 간의 대화를 통해 드러낸다. 작가인 아서 밀러는 매카시즘의 광풍이 미국을 강타할 때 거기 있었다. 거기 있었을 뿐만 아니라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러니 <시련>이라는 제목은 주인공인 존 프록터와 그 주변 인물들에게 닥친 시련과 동시에 작가인 자신에게 닥쳤던 곤욕을 표현하는 단어이기도 할 것이다.
<시련>이라는 하나의 이야기에 대한 내 이해는 연극 관람과 희곡 독서를 통해 점차 확장되었다. 그러나 2019년 4월의 어느 날 동국대학교 이해랑 예술극장에서 보았던 연극 <시련>과 오늘 내가 단숨에 읽어 내려간 아서 밀러의 <시련>을 ‘동일한’ 작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 번의 경험을 단번에 포개어도 되는 것일까. 연극과 문학에 모두 일천한 나는, 다만 한 가지만을 확언할 수 있을 뿐이다. 보다 풍성한 이해를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
소설을 즐기기 위해서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합니다. 영화나 미술도 그렇습니다. 소설을 진지하게 읽고 영화의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허세를 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높은 수준의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향유하기 위해서입니다.
-<말하다> 중, 김영하
2019.4.22.(월)
-2019 민음 북클럽
태어나자마자 책덕후였던 모양이다. 부모님께 잘 보채지 않았던 어릴 때의 내가 유일하게 떼를 쓰며 사달라고 했던 게 책이었단다. 당연히 기억은 안 난다. 어쨌든 정신을 차리고 보니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책이, 독서라는 행위가 전보다 더 좋다. 어느 순간부터인지 특정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꾸준히 좋아해 왔는데 더 좋아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아무튼 나는 책을 좋아한다. 독서를 좋아한다. 이전보다 더.
오늘 2019 민음 북클럽 가입선물을 부산 서면의 '북그러움'에서 찾아 왔다. 동네책방 픽업 옵션을 선택해 선물이 몇 가지 더 있었다. 이로써 올해 나는 문학동네와 민음사, 두 출판사의 북클럽 회원이 되었다. 동시에 도합 여덟 권의 책이 수중에 들어왔다. 행복하면서도 조금 두렵다. 이병률 시인의 어떤 글에 등장하는, 책과 잡지와 각종 잡동사니들을 2층에 수북이 쌓아두다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2층 바닥이 무너져 1층에서 깔려 죽은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남 일 같지 않다.
2019.4.23.(화)
-<데이비드 호크니:Works from the TATE Collection> (2019), 서울시립미술관
바다를 본다. 매일같이 본다. 부산에 살고, 부산에서도 영도에서 일하는 자의 특권이라고 여긴다. 오늘도 바다 감상은 좋았다. 바다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날씨를 반영하여 제 모습을 바꾼다. 그 물결의 움직임, 하늘빛과의 조화, 날 좋은 날 마치 다이아몬드가 박힌 듯 반짝이는 모양 같은 것들이 언제나 제각각 아름답다. 할 수만 있다면 하루 종일 관찰한대도 좋을 것이다. “오션 뷰 아파트를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하지만(실제 거주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 내심 그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기지개를 펴고 창문 너머 보이는 바다를 확인하는 아침 일상, 에 대한 환상 때문 아니겠는가.
현재 서울에서 가장 핫한 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데이비드 호크니 전’에 전시 첫 날 다녀왔었다. 마음을 잡아끄는 작품들이 많았지만 그 중에서도 자꾸만 걸음을 되돌리게 하는 그림은 역시 <더 큰 첨벙>이었다. 비록 바다가 아닌 수영장이지만, ‘첨벙!’ 하는 순간의 물결 모양들은 평소 내가 보는 바다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유명한 미술가의 전시를 가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순간은 작가의 붓 터치를 가까이서 관찰할 때이다. 일면식도 없는, 나만 그 사람을 아는 일방적 관계임에도 그의 붓 터치를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괜히 작가와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큰 첨벙>을 보면서는 오히려 호크니와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대자연의 움직임을 연상시킬 정도로 치밀하고 세심한 표현 때문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 날 호크니의 그림을 보며 바다를 떠올렸다면, 오늘은 바다를 보며 호크니의 그림을 떠올린다. 현실과 예술의 경계가 내 안에서 모호해지는 이런 순간들이 좋다.
2019.4.24.(수)
-<환대에 대하여>, 자크 데리다
며칠 전 재미삼아 친구가 알려준 모바일 어플로 내 사주를 확인했다. 어플에 대한 사용자들의 후기가 호의적이었다. ‘너무너무너무’ 잘 맞춘단다. 유료도 아닌데 그렇게 잘 맞출 수가 있나. 어차피 가벼운 마음으로 보는 건데 뭐 그게 중요한가. 아무튼 호기심 해결을 위해 생년월일 및 시간, 이름 따위를 집어넣고 나온 사주를 확인했다.
결과는 조금 놀라웠다. 꽤나 날카롭게 나를 짚어낸 문장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도 의미심장한 문장은 이것이었다. 당신은 사람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란 본디 누군가와 같이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이 나를 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당신은 행복하게 살 수 없다, ‘같이’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한참 동안 그 문장들을 다시 읽었다. 이런 결과를 이전에도 한 번 받아본 적이 있었다. 취업성공패키지를 위해 받은 직업 관련 적성 검사였다. 검사의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지만, 한 가지는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다른 모든 점수가 무난했던 것에 비해, ‘타인에 대한 신뢰’ 부분은 현저히 낮은 수치로 나왔던 것. 상담사는 웃음 속에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짐짓 농담처럼 질문을 던졌다. “왜 이게 이렇게 낮게 나왔을까요?” 그 분에게 제대로 답변을 하진 않았지만 나는 답을 알고 있었고, 그 수치가 당혹스럽지도 않았다. 도대체 타인을, 누군지도 모르는 이를 어떻게 신뢰한단 말인가. 언제 나를 할퀴고 사라질 줄 알고. 그러니 굳이 호의를 베풀 필요도 없다. 특히 거리에서 나는 그 누구보다 빨리 걷고, 그 누구보다 냉랭한 사람이다.
어쩌면 이게 다 방어적인 태도의 일환일지 모른다. 초등학생 때는 집 앞에서 모르는 이에게 길을 알려주는 호의를 베풀다 성추행을 당했고, 중학생 때는 신호를 기다리며 횡단보도 앞에 가만히 서 있다가 (나도 아니고) 내 사촌동생을 싫어하는 또래 무리들로부터 대뜸 욕설을 들었다. 고등학생 때는 골목에서 한 무리에게 돈을 빼앗긴 적도 있었는데, 뇌의 망각 능력 덕분인지 정확한 상황 같은 건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10대 시절에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뇌는 스스로 학습을 한 셈이다. 타인을 신뢰하지 말 것. 어떤 위험천만한 일이 벌어질지 모르므로. 방어적인 태도는 일상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고자 하는 나름의 노력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며칠 전에 읽은 내 사주가 떠오른 건 <여행의 이유> 때문이다. 작가는 ‘환대의 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행길에서(혹은 일상에서) 자신이 누군가를 기꺼이 ‘신뢰’했을 때, 그 누군가는 자신을 기꺼이 ‘환대’해 주었다. 그 경험은 환대를 받은 이로 하여금 또 다른 이에게 환대를 베풀게 한다. 그렇게 신뢰와 환대가 순환하고, 그러면서 사회가 조금 더 나아지는 것. 이것이 작가가 이야기하는 환대의 순환이다. 그런데 그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는 동안 마음이 심하게 울렁거렸다. 환대. 환대라는 단어 때문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환대를 갈구하는 인간이었다. 어떤 조직이나 집단, 가족의 환대받는 구성원이 되기를, 아니 무리 없이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며 전전긍긍했다. 끊임없이 사람들의 눈치와 사람들 간의 공기를 살피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해도 속한 곳의 환대를 받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여전히 갈구한다. 별다른 노력 없이, 존재 자체만으로 환대받는 경험. 설령 그것이 불가능하다 해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나오는 희구를 어쩌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책을 읽고 보니 문제는 노력 부족이 아니라, 신뢰였다. 마음을 꽁꽁 닫아둔 채 타인에게 신뢰를 주지 않는 사람이 언감생심 환대를 기대했던 것이다.
오래 전에 읽어 책장 한 켠을 작게 차지하고 있던 책을 꺼내 들었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무조건적/절대적 환대(환대의 법)’와 ‘조건부 환대(환대의 법들)’를 구분한다(<환대에 대하여>). 정체를 알 수 없는 그 누구라도 환대하는 절대적 환대의 반대급부에, 주인이 이방인을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어느 정도만을 허락하는 조건부 환대가 있다. 현실 세계에서 절대적 환대란 실현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플라톤 식으로 말하면 ‘환대의 이데아’라 표현해도 될까. 그러나 누군가는 그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절대적 환대를 이야기해야 하고, 환대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사유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 이제야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조금 알 것 같다.
사람을 어떻게 믿냐고,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다고 의기양양하게 주장하던 지금까지의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렇게나 여러 차례, 세계가 나에게 동일한 이야기를 해올 때는 최선을 다해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대체로 그것은 변곡점이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게임을 제안하며 “인생을 통째로 복습하는 거야.”라고 비아냥거린다. 그러나 그런 악의적인 제안이 아니더라도 삶은, 세계는, 신은, 그리고 책의 지혜는 때로 선선히 ‘인생을 통째로 복습해보라’는 제안을 해온다. 한 사람을 신뢰하는 데 엄청난 시간이 필요했던, 그 시간을 통과해내지 못하면 냉정하게 관심을 끊어버리던 지난날에 대해 생각한다. 이러한 사유가 행동에도 반영되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아주 천천히, 어제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간다.
2019.4.25.(목)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서효인+박혜진
‘영향’이라는 단어 자체엔 그 어떤 가치도 담겨 있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단어를 주로 이렇게 사용한다. ‘선한’ 영향, 혹은 ‘악’영향. 중립적인 단어에 주관적 가치 판단을 싣는 것이다. 나는 영향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영향을 주고 받기를 즐긴다. 이 때 영향이라는 단어 앞에는, 조금 유치하고 모호하지만 ‘좋은’이라는 수식어가 생략되어 있다. 좋은 영향을 받고 싶고, 또 내가 받은 좋은 영향이 필요한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주고 싶다. 네 번에 걸쳐 썼고, 앞으로도 계속 쓰게 될 이 <생각의 일기>에는 그런 바람이 담겨 있다. 아예 제목을 바꿀까 싶기도 하다. <영향받은 자의 일기>로.
<생각의 일기> 역시 몇 개의 텍스트와 프로젝트가 내게 준 영향의 산물이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서효인 시인과 박혜진 평론가의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 가장 간접적으로는 <일간 이슬아 수필집>, 가장 오래된 영향으로는 김혜리 기자의 <영화의 일기>(<cine 21> 연재), 그리고 ‘월간 윤종신’. 시작의 동력인 동시에 나를 계속 쓰게 하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래서 꾸준히, 조금씩 영향 받고자 책상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읽는다. 하지만 뭐든 지나치면 곤란하다.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할 것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읽을 것들은 이토록 쌓여가고>를 읽는다. 제목을 볼 때마다 자리를 못 잡은 책들이 굴러다니는 내 방을 묘사하는 것만 같아 뜨끔해진다. 그러면서도 이 책을 쓰신 두 분(작가이자 민음사 편집자)만 하겠나 싶어 동시에 안도하게 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