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 이야기 |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는 동생의 시선
이 글은 브런치북으로 엮기 위해 재업로드한 글입니다.
(원문: https://brunch.co.kr/@hhy134/9)
논 타작을 했다. 일주일 만에 황금들녘이 이제는 텅 비었다.
흔하디 흔한 쌀일 뿐인데,
그래도 창고에 벼나락이 두툼하게 찬 톤백을 보면 든든하다.
물 관리가 핵심인 벼농사는 아직 잘 못한다.
아직 미숙해서 자꾸 논을 말려버리거나, 넘쳐 흐르게 한다. 난 그럴때마다 밭 농사가 많다는 핑계를 댄다.
다른 농부들에 비해 현저히 낮은 동일면적 당 벼 수확량이 나에게 현실을 알려준다. 다른 논에서 1마지기(200평)에 80kg, 4포대가 나온다고 한다. 우리 논에서는 3포대가 겨우 나올까 말까한다.
밭농사가 아니라 논농사 스킬을 좀 올려야 하는데, 모내기 하고 물을 봐야하는 5월이 밭농사도 가장 바쁜 시기이다. 대안이 시급하다.
흔하디 흔한 벼처럼, 누구에게나 있는 부모님,
이번 글은 내 어머니에 대해 써보려고 한다.
나는 일명 마마걸이었다.
어머니와 떨어져 있기 싫은 나머지 유치원부터 자퇴를 감행했다.
친구들보다 어머니랑 노는 것이 더 좋아서 초중고등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왔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 어머니와 함께 잤다.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우리 자매는 어머니를 통해 온갖 신문물을 경험했다.
한국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일본에서 포닥(박사후연구원)까지 하신 어머니는 일본에 살며 외국어의 중요성을 일찍이 깨달으셨다. 한국인에게 그나마 쉽다는 일본어조차 이렇게 어렵다면, 영어는 얼마나 배우기 어려울까. 당신이 자식을 낳는 다면 어릴적 조기유학을 보내야겠다고 80년대 당시 미혼이 결심했다.
그리고 20년 뒤, 초등학생 두 명을 데리고 아무도 없는 뉴질랜드로 가셨다. 아마 제주도에서 조기유학 1세대였을 것이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Christchurch 한 동네, 한국인 학생이 없다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우리 자매의 뉴질랜드 생활은 단순히 영어만을 배운 시간이 아니었다.
우리 자매는
'운동 중 못하면 죽는 유일한 운동'이라며 수영을 배웠고,
수영할 때의 폐활양도 늘릴 겸 플룻을 불었다.
음악의 기본인 피아노는 한국에서부터 뉴질랜드까지 쭉 배웠고,
뉴질랜드에서 접근성이 높은 승마도 매주 배우러 갔다. 점프하다 떨어져서 청심환 먹고 그만뒀다.
지금 안 해보면 언제 해보겠냐며 돌고래와 함께 스노쿨링도 했고,
겨울에도 레저스포츠를 즐길 줄 알아야 한다며 매 겨울 스키 캠프를 갔고,
여름에는 영화 '페어런트 트랩(The Parent Trap)'처럼 대규모 학생 캠프가서 침낭 생활도 했다.
이렇게만 보면 치맛바람 센 어머니 같지만 쿨하셨다.
우리가 다니던 학교에는 매일 전교생이 달리는 시간이 있었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자체 크로스컨트리(Cross country) 대회를 준비하는 시간이었는데, 매일 아침 달리는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쪽지를 써달라고 했다. "얘가 아프니까 달리기 시키지 마세요"라고.
뽑기(달고나)가 먹고 싶다고 하니, 뽑기 세트를 한국에서 택배로 받아서 해먹기도 했다.
동네 비디오 대여점(당시 블록버스터Blockbuster)에 가서 매주 영화를 빌ㄹ봤다.
방학 때마다 아버지가 뉴질랜드로 한두달씩 오셔서 남섬 곳곳을 여행했다. 반지의 제왕 촬영지, 퀸스타운, 밀포드사운드 등, 뉴질랜드에서 유명하다는 곳은 다 가봤다.
이 모든 경험은 뉴질랜드에서 2년 동안의 추억이다. 짧지만 강하게 남아있다.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한국에 돌아와보니 문구점에서 사는 간식, 일명 불량식품이 너무 맛있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어차피 한 때'라며 문구점에 만 원씩 선결제 해놓고 마음껏 사먹으라고 하셨다.
주변에 돌아보니 같은 반 친구들은 다 학원을 다니는데 나만 가는 학원이 없어서 아쉬웠다. 그래서 나도 학원을 보내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다니고 싶으면 다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다녔다. 학교 옆 수학학원에. 태권도도 다니고 싶다고 해서 다녔다.
이런 어머니는 나에게 너무 멋있는 존재였다. 마마걸이었던 나는 이미 초등학교, 아니 (자퇴한) 유치원생일 때부터 어머니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들보다도 어머니랑 노는게 재밌었다.
어머니와 놀 때 대화의 주제는 자주 '네 아빠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였다.
이렇게 멋있는 어머니는 아버지 때문에 힘들어하셨다. 주로 경제적인 문제였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와 다르게 중고등학교에 들어오면서 오히려 두 분이 소리치고, 싸우는 일은 점점 드물어졌다. 아예 소통을 단절시키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서로의 존재를 무시하고 외면했다.
언젠가부터 아버지가 집에 오시면 어머니는 당신 방으로 들어가셨다. 언젠가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의 냉전과 침묵은 기본 세팅이었다. 두 분의 관계는 이미 끝이 났는데, 나와 언니가 있어서 표면적인 관계를 끝내지 않는거라고 하셨다.
고등학교, 나는 비교과를 위해 TEPS 영어 시험을 종종 봤다. 그래서 중간고사를 막 마친 2011년 5월 14일 토요일, 여느 TEPS 시험 보러 가는 날. 같이 집에 있으면서도 어머니와 아버지가 대화하지 않는 예삿날이었다.
7시 전후였던가. 어머니가 나를 깨우러 오셨다. 시험장으로 가려면 지금 시간 쯤은 일어나야 한다는 내용의 말을 하면서 깨우셨다. 근데 말이 안 됐다. 어눌했다.
응?
눈 비비면서 일어나 식탁에 앉았다.
아버지는 세면장과 옷방을 오가며 묵묵히 지인 결혼식에 갈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아침을 먹고 있는 내 맞은 편에 앉아서 어머니는 시험장에 어떻게 갈지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근데 말이 안 됐다. 어눌했다.
응? 왜 저러시지?
어머니가 마실 걸 챙겨주시려는지 일어나서 주방으로 가 냉장고 문을 열려고 하셨다. 근데 왼손을 못 올리셨다.
응? 왜 저러시지?
내가 냉장고 문을 열고, 마실 걸 꺼냈다. 어머니는 다시 식탁에 앉으셨다. 아버지는 특유의 애용하는 향수을 뿌리시고 집을 나서셨다. 나는 아침을 먹었다. 시험장까지 버스타고 갈지, 차를 타고 갈지 - 어머니는 계속 말씀을 하시는데 언어적으로 말이 안 됐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응? 왜 저러시지?
갑자기 졸리다고 하셨다. 소파에 앉으셔서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께 이불을 덮어드렸다. 덜컥 겁이 났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해야지 했는데, 핸드폰을 학교에 놔두고 왔다는 걸 깨달았다. 학교는 걸어서 10분 거리었다. 어머니를 깨웠다.
'엄마, 나랑 나가자'
어머니는 칭얼댔다. 피곤해하셨다. 그래도 나가야 한다고, 아직 날이 쌀쌀하니 옷을 챙겨 입으라고 하고 집 밖을 나갔다.
같이 학교까지 걸어갔다. 가는 길도 이상했다. '기다려달라'라고 하면 기다리시고, '같이 가자' 하면 같이 가고. 원래 어머니는 '기다려달라'고 부탁해도 먼저 슬슬 걸어가시는 분이셨다. 근데 오늘따라 말을 잘 듣은 어린이가 됐다, 갑자기 몇십분 사이에. 당혹스러웠다.
아침에 어머니가 이상했을 때, 외출 준비하는 아버지에게 바로 얘기할 생각을 안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싫어하니까. 하지만 홀로 아이가 된 어머니와 남겨진 내겐 대안이 없었다. 학교로 가서 핸드폰을 찾고,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아빠, 엄마가 이상해
아버지는 급히 학교로 오셨다. 택시를 잡아탔다.
'빨리 제주대학병원으로 가주세요'
어머니는 자꾸 눈을 감으셨다.
그 때부터였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심이 커진 것이. 아버지가 어머니를 힘들게 해서, 어머니가 아픈 거라고.
어머니가 아픈 건 아버지가 어머니를 힘들게 해서라고.
병원에 도착했다. 응급실에 접수했다. 몇 시간 후 의사가 나와서, 뇌졸증이어서 후유증은 있겠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해외에 있는 큰 딸을 불러야겠냐는 아버지의 질문에 의사선생님은 그럴 필요까지는 없겠다고 했다. 다행이었다. 일단 대학이고 뭐고 없다. 나는 어머니 간호해야지 마음먹었다.
다시 몇 시간 후, 의사 선생님이 다시 나와 아버지를 부르셨다. 큰 딸을 한국으로 부는 게 좋겠다고 했다.
'환자분의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하다'고.
그리고 의사가 말했다.
환자분께서는 매년 3월에 정기건강검진을 받는데, 올해는 안 받으셨네요.
현재는 5월.
급성백혈병.
토요일에 어머니는 뇌졸중으로 쓰러지셨지만, 이건 합병증이었다.
몇 달 동안 감기가 안 나으시고, 계속 기침을 하셨던 게 떠올랐다 - 면역력 저하
주말에 어머니가 쉬실 때 보면 다리 곳곳에 멍이 들어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 혈소판 감소
아, 고3이 무슨 지위라고.
몇 달 동안 감기가 안 나으면 병원이라도 가보시게 할 걸.
다리 곳곳에 멍든 모습, 한 번도 손찌검 하지 않은 아버지를 의심할 게 아니라 다른 원인을 의심해볼걸.
내 시험에 급급해서 어머니가 어떤 상황인지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응급실에서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에 대한 나의 원망심은 더 커졌다. 아버지가 어머니를 힘들게 해서, 어머니가 아픈 거라고. 미웠고, 원망스러웠다.
어머니는 토요일에 쓰러지셨고, 언니는 화요일에 도착했다.
수요일이었다.
의사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다. 짧은 중환자실 면회시간, 온 친척과 가족이 어머니를 둘러쌌다.
마마걸이었던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하늘이 무너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 순간이 다가오자 생각보다 담담했다. 어머니는 자주 이렇게 말씀하셨다.
"엄마가 너랑 언니 곁에 평생 있지 않을 거야."
"이럴 시간이 얼마 없어. 언제 이렇게 시간을 같이 보내겠어?"
이렇게 조기교육을 잘 받아서 어머니가 평생 곁에 없을 거라는 걸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생각보다 담담했던 나는, 어머니의 임종 그 순간 내 본모습을 처절하게 보게됐다. 임종 그 순간, 나는 울었다. 다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슬퍼서가 아니었다. 어머니를 힘들게 한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서 울었다.
아버지, 당신을 원망해.
당신 가슴을 아프게 하기 위해 나는 더 슬프게 울거야. 더 더 슬프게.
그리고 한 켠에 피어오르는 해방감. 나를 이제 제주도에 묶어둘 사람은 없어. 이 집구석, 최대한 빨리 탈출한다.
어머니가 숨 넘어가는 순간에 나는, 악심惡心으로 내 원망감을 우선 표출한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바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부터 어떻게 살지 궁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 말이다.
내가 이토록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인간일줄이야.
5월 18일 수요일,
장례식장으로 가는 날씨는 화창한 봄날이었다.
도로 옆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났다.
어머니는 갔는데, 세상은 똑같았다.
그 때 알게됐다.
내겐 평범하고 행복한 하루인 날에도, 이렇게 매순간 누구에게는 죽음의 순간, 이별의 순간이겠구나.
장례를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다. 상주 머리핀을 꽂고, 예전과 똑같이 밤 11시까지 야자(야간자율학습)를 했다. 아무일 없다는 듯이 대입을 준비했다.
재수란 없다.
나는 탈출한다. 대입지옥에서, 제주도와 집에서.
날 더이상 붙잡을 사람은 없다.
더이상 내가 붙잡힐 사람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