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es own seoul
신선식품 재고 체크의 혼동으로 노오란 알배기 배추를 왕창 사버렸다. 나도 한 통, 달도 한 통, 각각 주문한 다음 며칠 지나지 않아 또 한 통을 사버려 냉장고 야채칸은 배추로 풍성해졌다. 그래도 괜찮다. 배추는 생각보다 쉽게 무르지 않고 이 시기의 배추는 몹시 달고 맛있으니. 냉동 차돌박이와 배추, 얇게 썬 새송이 버섯과 숙주로 배추찜을 해 먹는다. 깊은 냄비에 찜기를 놓고 그 위에 차례로 재료들을 쌓는다. 냄비 뚜껑이 덮이지 않을 정도로 기세 좋던 배추는 김이 오르는 사이 차차 숨이 죽는다. 넓은 접시에 쌓아놓고 매콤한 양념간장에 푹푹 찍어 먹는다. 담백하고 따뜻한 맛, 많이 먹어도 속이 편한 맛이다.
보쌈을 삶아 생배추를 곁들여 먹어도 좋다. 쌈장에도 푹 찍어 먹고, 김치 양념에 버무려 먹기도 한다. 집에 잠시 다녀간 엄마는 무와 쪽파, 생굴에다가 김치 양념을 버무려 보쌈김치를 한 통 만들어 둔다. 할머니 따라다니느라 얼쩡거리던 아기는 배춧잎 한 장을 얻어들고 이리저리 베어 먹는다. 물론 생배추도 맛있긴 하지만 그렇게 덥석 덥석 베어 먹을 일인지. 맛있어? 하고 물어보면 응! 하고 크게 대답한다. 아기 볼 근처에 얼굴을 들이밀면 아삭아삭 소리가 났다.
그래도 배추가 남았기에 이번엔 전을 부쳐보기로 한다. 어릴 때부터 먹고 자랐다던지 하는 익숙한 음식은 아닌데 레시피가 쉬워 보여 도전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레시피 소개글의 '많은 양의 배추를 빠르게 소진할 수 있습니다.'란 구절이 마음에 들었다. 먼저 배추의 잎을 하나씩 떼어 씻어준다. 한 통 다 먹을 요량이면 처음부터 밑동을 잘라내도 좋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던 터라 한 장씩 잎을 떼었으나, 결론적으로 한 통을 다 먹고 말았다. 뻣뻣하게 누운 배춧잎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세워든 칼의 자루 밑 부분으로 쿵쿵 찧는다. 몇 번만 내리쳐도 억센 줄기가 조금 흐물흐물해진다. 이 반복적인 행위엔 역시 '조사버린다.' 란 표현이 제일 잘 어울린다. 문득 쿵쿵거리며 칼자루를 휘두르는 내가 섬찟해 보이기도 한다. 불현듯 누군가 떠오르기도 한다.
배추들은 이제 힘 없이 차곡차곡 누워있다. 커다란 볼을 꺼내 계란을 깨뜨려 넣을 차례다. 몇 알, 정해진 개수는 없다. 한 번에 다 넣지 않아도 되니 그때그때 남은 배추양(과 위장의 가용 범위)을 고려해 더해도 좋다. 잘 푼 계란물에 굴소스를 한 술 떠 넣고 젓는다. 미미하게 옅은 갈색의 계란물이 준비되면 거기에 배추들을 풍덩풍덩 빠뜨린다. 굴소스로 맛과 간, 둘을 잡았으니 이제 굽는 일만 남았다. 아, 지지는 것이라 해야 할까?
기름을 두른 팬을 달군다. 언제나 달군 팬이 더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낸다. 손바닥을 쫙 펼쳐 열기를 확인한 다음, 첫 번째 배춧잎을 올린다.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배춧잎을 계속 올린다. 팬에 빈자리가 없도록 가득 채운다. 열심히 '조사버렸음'에도 여전히 뻣뻣한 기운이 남아있던 배추들도 이내 얌전히 고꾸라진다. 어지간해선 손대지 말고 처음 올린 그대로 냅두면 된다. 중간중간 조금씩 기름을 보충해 주다 이제 어느 정도 익었겠구나, 싶으면 젓가락으로 한번 뒤집어 본다. 배추의 흰 줄기, 노란 잎의 잎맥들이 살짝 갈색으로 그을렸으면 딱 좋다. 방금 뒤집은 면 역시 그 정도로 구워지길 기다리며 넓은 접시를 꺼내놓으면 된다. 이쯤 맥주를 따도 좋다. 불가에 서 전 부치는 냄새를 맡으며 마시는 맥주의 맛, 더 말해서 무엇하랴.
다 구워진 배추전은 접시에 차곡차곡 얹는다. 인앤아웃, 선입선출, 그리고 낙장불입이던가? 배추전 나간 팬 위엔 새 배추가 금세 올라온다. 끊김 없이 부드럽고 부지런히 계속 부쳐야 한다. 굽고 올리고 부치고 뒤집고 하다 보면 이게 참 선순환을 이루며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이 아름다운 저녁을 만든다. 집안 곳곳엔 기름 냄새 은은하고, 하이체어에 앉은 아기는 제비처럼 입을 쩍쩍 벌려가며 달이 집어주는 배추전을 받아먹는다. 생배추도 즐겨 뜯는 아기니 배추전은 천상의 맛이겠지. 계속해서 전을 구워야 한다는 명분으로 나는 불판 앞을 떠나지 않는다. 자리에 앉지도 않고 선 채로 팬 위의 배추전을 홀랑홀랑 말아 넣는다. 가위로 자르지 않고 결 따라 찢지도 않는다. 젓가락으로 돌돌 말아 입으로 쏙 가져간다. 막 만든 배추전은 따스하고 말랑하다. 겹겹이 부드럽다. 기름 먹은 배추가 이렇게 황홀한 맛을 내다니.
너무 맛이 있어 계속 굽다 보니 한 통을 다 먹고 만다. 밥도 없이 배추전과 겉절이 김치, 그리고 맥주로 근사한 저녁을 마무리 짓는다. 우리는 기름기 묻은 입술로 만족스럽게 웃는다. 달과 아기는 목욕을 하러 욕실로 들어가고, 나는 그 사이 환기를 시키려 한다. 창을 열자마자 겨울 저녁다운 바람이 훅 밀려든다. 갑자기 잊었던 사람이 떠오른다. 사실, 아까 배추 줄기를 칼로 내리칠 때 떠올랐던 바로 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