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할 수 없는 만남
그와 연락처를 공유한 후, 계속 카톡으로 연락을 했다. -그래 봤자 몇 시간- 그러다 어디인지, 아직 학교면 잠깐 얼굴 보자는 말에 고민을 했다. 그땐 공강이라 동기들과 편의점에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시간은 됐지만 내 얼굴이 안 됐다.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머리를 안 감고 모자를 쓰고 다녔는지, 만나자고 얘기를 듣던 날도 머리를 못 감아서 -안 감은 것이다.- 칼단발 위에 모자를 거꾸로 쓰고 있었다. 오늘은 모습이 좀 -많이- 그래서 다음에 보자고 했지만, 5분 정도면 된다고 했다. 그도 수업이 있었는지 금방 갈 거라고, 네가 있는 쪽으로 가겠다며 그는 편의점으로 왔다.
편의점에서 나와 큰 로비에서 둘은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하면서. 그가 나를 처음 보고 한 말이었다.
“실물이 더 예쁘네.”
그리곤 얼굴을 봤으니 됐다며 이어폰을 꼽고 그냥 가버렸다. -저때 왜 시크한 척한 거야?- 사실, 정말 실물이 더 예쁜지 내 얼굴을 확인할 만남의 길이는 아니었기에 의아해하며 동기들에게 돌아왔다.
“얘들아. 저 사람이 나보고 실물이 더 예쁘대.”
“야, 너 나갔다가 온 지 2분도 안 됐잖아. 너 잘못 본 것 같은데?”
“내 말이...”
그러면서 깔깔 웃는 동기들 사이로 울린 카톡음 사이로 이런 메시지가 왔다.
아주 솔직하고 멋진 남자였다. 지금도 그러하고.
우리는 매일 만났다. 그가 다닌 공대는 인사대 바로 앞에 있었다. 같이 점심을 먹기도 하고, 학교를 마치고 같이 시내를 가기도 하고, 아니면 아예 밤에 만나기도 했다. 신기하게도 -다행히도- 그는 내가 사는 곳에서 굴러서 갈 수 있을 정도로 -내리막길이라 가능- 가까이 살았다. 걸어서 5분 거리, 뛰면 2-3분 거리였던 그의 집.
5월 14일은 로즈데이, 남자만 꽃을 주는 날은 아니잖아. 내가 좋으면 여자도 주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나도 사람에게 빠지면 다 퍼준다.- 그는 그때 학과 사무실에서 하루에 몇 시간씩 일을 했는데, 거의 밤에 마쳤다. 그가 일을 하는 동안, 나는 도서관에 가서 신나게 편지를 쓰고 텅 빈 그의 필통을 기억하며 새 볼펜을 사고 꽃집에 들러 장미와 안개꽃, 꽃병을 샀다. 설레는 맘으로 고데기도 하고, 옷장을 뒤적거리며 최대한 날씬해 보이는 블랙룩으로 맞춰서 우리 집 아파트 놀이터로 갔다. 벤치에서 얘기를 하고, 꽃과 선물을 건네줬다.
“오늘 로즈데이래요.”
“아, 고마워. 나도 집 오는 길에 사려고 꽃집 갔는데 문을 닫았더라고. 어떡하지? 난 아무것도 준비한 거 없는데.. 어떡하지..”
받으면서도 어떡하냐는 말만 혼자 몇 번을 반복하던 그. 됐다며 동네를 빙빙 돌며 걸었다. 그러다 그의 집 주변으로 자연스레(?) 가게 됐는데, 잠깐 집에 들어오겠냐는 물음에 헉했다. -뭔 상상했니..- 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아닌 것 같았다. 왜? 맨발로 플랫슈즈를 신고 있었으니까. 블랙 스키니에 블랙 플랫슈즈를 입었던 그날, 꽤 걷기도 많이 걸었는데 맨발이라니! 혼자 속으로 엄청난 고민을 했다.
‘집으로 들어가면 신발을 벗을 텐데. 벗겠지. 미국도 아니고. 그럼 내 맨발을 보일 테고, 혹시라도 냄새나면 어떡하지? 스키니도 낑겨서 앉기 힘든데.. 아유..’
난 발이 길고 예쁜 편이지만 -진짜다.- 누군가에게 맨발을, 심지어 썸남에게 이런 식으로 맨발을 보이기엔 민망했다. 양말을 신을 걸, 아니 운동화를 신을 걸, 그럼 양말은 자연스레 신겠지. 혼자 별 후회를 다 하면서 꽃만 두고 오겠다고 그를 따라갔다.
평범한 남자의 자취방 모습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원룸 안으로 신발을 조심스레 벗고 들어갔다. 베란다 선반 위에 꽃을 두고, 잠시 방에 앉아 이것저것 얘기를 했다. 그리곤 정말 라면 하나 주지 않는, 아무런 스킨십도 없던 허무하면서 다행이었던 그 밤. 내 맨발도 다행이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 왼쪽 발이 접질렸는데, 다 나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거 조금 걸었다고 발이 욱신댔다.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기에 혼자 택시를 타고 시내를 가려던 날. 그는 자기 때문에 오래 걸었으니 병원을 같이 가주겠다고 했다. -그냥 같이 있고 싶다고 해.- 함께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마치고, 롯데리아로 향했다. 2층에 앉아 햄버거를 먹어야 했는데, 그것도 민망했다. 햄버거를 먹을 때 우리는 얼마나 추해지는지를 알지 않는가? -아닌 사람은 아니겠지만- 나는 특히나 칠칠맞아서 패티나 소스를 잘 흘리고 먹는다. 입 옆에도 잘 묻힌다. 그런 모습이 보여주기 싫어서 생각한 게 친구의 말이었다.
‘남자랑 햄버거 먹을 때 햄버거 감싼 종이 있잖아. 그걸 위로 쭉 펴는 거야. 얼굴이 가려지게. 그럼 나도 상대방도 서로 안 보여. 그럼 편하게 먹을 수 있지.’
한 번 시도를 해볼까 싶어 쭉 올리고 한입 물었더니 왜 그렇게 먹냐고 그는 물었다. 솔직하게 말을 하니 웃으며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당신만 그러지 않아도 되지, 나는 그렇게 해야 먹을 수가 있다구요. -지금은 입에 뭐가 묻든 말든 잘만 먹는다.- 그렇게 햄버거 사건 후.
영화를 보러 갔다. ‘트렌센던스’ 라는 SF 영화이다. -첫 영화인데 좀 간지러운 거 볼 걸..- 버스에서 내려 영화관에 가는 그 짧은 순간, 그는 갑자기 내 손을 탁 잡았다. 내 손이 잡히는 순간 아랫배가 마구 간지러웠다. -화장실에 가고 싶은 느낌 아니다.-
사실 그가 손을 잡은 건, 전날 내가 카톡으로 ‘왜 손을 안 잡아요?’라고 물었다. -그럴 것이다. 그런 식으로..- 내 손을 한 번 힘껏 잡아달라고 내가 먼저 여우짓을 했었다. 그래서 그는 꽤 고민을 많이 하고, 혼자 손을 움찔거리다 겨우 잡았을 테다. -아님 말고.- 그런 설렘과 긴장, 그리고 내 연인이 되겠구나 라는 강한 확신을 느끼는 사이. 영화는 끝났다. 무슨 영화인지도 모를 만큼 온 신경은 그에게 쏟아져있었다. 내 옆모습이 이상하진 않을지, 콜라를 놓을 때 스치는 팔과 가끔 잡다 놓은 손의 촉감은 SF 영화보다 강했다. -정말 영화 예고편을 다시 봐도 기억이 안 난다.- 그리곤 피자헛에 가서 배부르다며 피자를 몇 조각 먹지도 않는, 참으로 여우 같은 짓을 많이 했던 데이트를 즐겼다. -지금 우리는 피자스쿨의 고구마 피자를 더 자주 먹고, 1~2조각만을 남기곤 다 먹는다. 세월이 이렇게 내숭까지 삼킨다.-
택시를 타고 5분이면 갈 수 있던 바다. 갑자기 밤바다에 가게 됐다. 5월의 중순은 밤바다를 즐기기엔 날씨가 꽤 괜찮았다. 바다 입구에서 내려 모래사장 뒤편으로 놓인 도보를 걸으려고 한 그 순간. 그는 갑자기 멈췄다. 왜 그러느냐는 말에
“수련아, 우리 사귀자.”
라고 내 심장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일단, 이렇게 빨리 고백을 받을 줄 몰랐고, 지금 우리 앞에 꽤 많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보를 걷기도 했고, 모래사장 뒤 그네 벤치에 앉아있기도 했는데 몇 사람은 그 고백을 들었는지 우리 둘을 아주 흥미롭게 쳐다보기도 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민망했는지 싫으면 싫다고 말해도 괜찮다고 했다. 나는 얼른 그의 팔을 끌고 사람이 없는, 그러니까 바다와 더 가까운 모래사장으로 끌고 가 모래를 밟으며 천천히 걸었다.
“아니, 싫은 게 아니구요. 저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당황해서..”
“괜찮아. 지금 대답하기 힘들면 안 해도 돼.”
“아니요. 그게 아니구..”
어쩔 줄 몰랐다. 그가 너무 좋았지만 고백을 받는 동시에 조금 허무했다. 조금 나쁜 년일지도 모르지만 더 멋진 멘트를 원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더 알아나간 후에 했어도 좋았을 것 같았다. 그땐 그 갑작스러운 고백에서, 좋아하는 감정이 아니라 급한 감정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또 막상 연애를 하자니 두려웠다. 여자면 밀당도 할 줄 알고, 여우짓도 잘해야 하는데 나는 항상 솔직하게 다 말하는 탓에 남자들이 금방 질려했었다. 처음엔 솔직하다며 좋다더니, 나중엔 내숭이 없다고 싫어했다. 그도 그런 남자들 중 하나면 어쩌지, 그 무서움이 밤바다 속에서 날 덮쳤다.
잠시 벤치에 앉자며 그를 데려가 그네 벤치에 앉았다. 그는 연애가 처음이라 고백을 언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친구들에게 물어봤다고 했다. 친구들은 그렇게 좋으면 빨리 고백하라고 재촉했다고 한다. 그래서 오늘 무조건 고백하겠다 다짐했다며, 서둘렀다면 미안하다고 했다. 시무룩한 표정과 그 말에 나는 웃음이 터졌다. 무작정 귀여웠고, 신선했다. ‘연애가 처음이라고? 오호’ 연애가 처음인 남자는 나도 처음이었다. -잘 걸렸다! 이놈!- 그리고 나는 혼자 파도치는 바다를 보다 만나자고 했다. 한 번 만나보자고, 아니 잘 만나보자고, 잘 부탁한다고. 서로에게 좋은 연인이 되어 보자고, 밤바다에서 약속을 했다.
사실 거부하지 않을 이유가 있겠는가? 밤바다에서, 선선한 그 5월의 중순에, 푹신한 모래를 밟으며, 적당한 조명이 있는 거리를 함께 걸었는데. 그리고 이렇게 잘생겼는데! 그런 기분 좋음에 들떠 있는 순간을 공략하다니! 아주 잘했다.
그렇게 우리의 거절할 수 없는 만남은 시작됐다.
설렘과 알콩달콩한 연애 초반은 잠시뿐, 어딘가가 안 맞는다. 안 맞아도 꽤 안 맞는 것 같은데 우리? 슬슬 발동 걸리는 두 사람의 ‘각자 취향’.
<긴 연애의 속살> 3편, 다음 주 9월 19일 수요일에 만나요~!
-참고로 남자친구와 내 이름 하나하나씩 따면 ‘수요’커플이 된다. 그래서 수요일 연재다.-
* 매주 수요일마다 연재할 예정입니다.
* 남자친구의 입장이 아닌 ‘저’의 입장에서 보고 겪은 시선입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기억이 낡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N드라이브와 페이스북 등을 찾아가며 자료를 모으고 있습니다.
* 많은 공감과 댓글 남겨주시면 애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