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그곳에 있었다』라는 산악 다큐멘터리가 있다. 일본과 미국 원정대가 '인간이 개척하기 불가능한 길'이라 결론 내린 가셔브럼 4봉 중앙 서벽. 이곳에 '코리안 다이렉트 루트'를 내기 위해 목숨 걸고 도전하는 산악인들을 다룬 영화다.
나에겐 산악 다큐멘터리 징크스가 하나 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즈음 엔딩 크레딧과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눈물. 이번에도 징크스는 깨지지 않았다. 산악 다큐의눈물 포인트는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등반 대원 중 누군가가 죽거나, 등반에 성공 또는 실패한 주인공에게 감정 이입하거나, 또는 둘 다거나.
이 영화는여기에 극적 장치를하나더 깔아놓았다. 등반 대원 모두 전문 탐험가가 아니라는 것. 영화의 등반대원들은 현재는 간판업자, 농경인, 사회복지사로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질문 하나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무엇이 평범한 이들을 저 산에 오르게 하는가? 그들이 이 도전을 성공한들 산악인들 외에 알아줄 사람도 없을 텐데 그들은 왜 목숨걸고 저 산을 오르려 하는가?
영화가 끝나고나서야 답이 제목 속에 있음을 알게 됐다. 그들은 단지 한 문장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 있었다'고.
그들의 목숨을 건 도전에 비할 바 못되지만, 나는 안다. 저 한 문장 안에 얼마나 밀도 높은 감정이 들어있는지를. 나 또한 훗날 그때 그곳에 내가 있었지, 하며혼자 흐뭇해할만한 소소한 도전을 이어오고 있기에.
어느 이름 없는 폭포를 찾기 위한 여정도그중 하나였다. 인터넷 블로그에서 스치듯 본 사진 한 장. 사진 속 그곳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2가지 지형을 모두 품고 있었다. 폭포와 소(沼). 보자마자 그곳에 있고 싶은 마음이 샘솟았다.내가 그곳에 간다고 달라질 건 없겠지만,갖고 싶어졌다.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기억을, 그곳에 마침내 닿았을 때의 황홀감을.
검색해 보니 폭포는 고살리 숲길 어딘가에 있는 듯했다. 당시는 1인 여행사를 설립하기로 마음먹고 코스를 짜던 시기였고, 마침 내가 짠 '날마다 소풍' 코스의 두 번째 장소가 고살리숲길이었기 때문에 사진 속 폭포에 닿는 길만 나쁘지 않으면 여기를 점심식사 장소로 해도 좋겠다고 판단했다.
참고로 여행사 첫번째 코스는 '천국의 문'이다
'천국의 문'으로 가는 길에 있는 빨간 우체통 클라쓰
다만 결정적 문제가 하나 있었다. 고살리 숲길을 몇 번이나 가봤지만 사진 속 폭포는 커녕 비슷한 곳도 본 적이 없었다. 나의 검색력이 부족한 걸까?아니면 내가 가보지 않은 길에 저 폭포가 있는 걸까?다시 가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겨울 어느 날, 스마트폰에 캡처한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고살리 숲길로 향했다. 초록 잎을 다 떨구고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나무들이 스산한 기운을 뿜어댔지만,초록의 기운은 여전했다. 우주에서도 살아남는다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이끼가 숲을 점령한 탓에 초록 잎들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많던 초록 잎들은 어디로 갔을까?바닥에 갈빛 낙엽들이나 여기 있다고 땅바닥에 뒹굴며 나름의 운치를 더했다.
속괴는 여전히 빼어난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직사각형 화분에 꽂혀있는 것처럼 보이는 적송이 어쩌다 저 바위 위에 뿌리내리게 됐는지는 볼 때마다 미스터리.
이제 폭포를 찾아보자. 다행히 길 끝에서 사진과 비슷한 지형을 발견했다. 건기라 물은흐르지 않았지만 비 올 때에는 충분히 폭포가 흐름직한 지형이었다. 문제는 이곳이 사진 속 폭포가 맞는지 확인하려면 저 밑으로 내려가봐야 하는데 내려갈 방법이 없다는 것. 주위를수색한 끝에 밑으로 내려가는 로프를 발견했지만, 높이 10미터의 수직 절벽 지형을 로프 하나에 의지해 내려가는 건 너무 위험했다. 분명 다른 길이 있을 텐데... 날이 저물고 있었고 일단은 철수하고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다시 현생을 살아내느라 당분간 이곳을 찾지 못한 건 비밀이다.)
봄, 여름을 보내고 초가을, 때늦은 태풍에 폭우가 쏟아졌다. 더는 미룰 수 없었다. 폭우가 쏟아진 다음날, 다시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초록은 짙었고 물빛은 깊었다. 시작부터 예감이 좋았다. 속괴를 지나 오소록한 길을 몇 분 더 걷자 폭포 소리가 들렸다. 내가 생각했던 그곳이 맞았구나! 그런데 어떻게 여기를 내려가지? 로프를 타고 내려가 볼까 했지만 아무래도 혼자 내려가기엔 위험해 보였다. 분명 주위에 내려가는 길이 있을 거야. 반경 100m를 샅샅이 뒤졌다. 찾았다! 내려가는 길은 내가 예상했던 지점의 반대편에 있었다. 밑으로 내려갈수록 폭포 소리가 가까워졌다.
때로 어떤 풍경은 수식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이런 아름다운 그림에 제목은 붙여줘야 할 것 같아서 폭포의 이름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때 뇌리를 스치는 단어, 세로토닌(Serotonin, 행복 호르몬)! 그래,세로토닌 폭포(Serotonin falls)!
이름은 세 가지 의미를 품고 있다.
1. Serotonin falls(세로토닌 폭포)
2. Serotonin falls(세로토닌이 떨어진다)
3. Serotonin in fall(가을 어느 날의 세로토닌)
나를 그곳에 닿게 한 건 도파민이었으나 그곳에 닿았을 때 저 폭포처럼 나의 두뇌에 폭포처럼 쏟아지던 건 세로토닌이었으니, 자극적이고 일시적인 쾌감을 주는 도파민보다는 소소하지만 은은하고 지속적인 행복을 주는 세로토닌을 추구하자는 나의 가치관과도 궤를 같이 하는 이름이었다. 오늘부터 너의 이름을 세로토닌 폭포로 명명하노라. 땅,땅,땅!
폭포 소리에 새소리가 더해졌다. 햇살이 숲 사이로 삐져나와 빛으로 이뤄진 시스루 커튼을 쳤다.숲 사이를 헤치고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내 얼굴을 쓰윽 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