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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피 지망생 Jan 30. 2023

이런 일출이라면 꿀잠을 포기할 수도

숨은 제주를 발견하는 재주 16 - 한라산 정상에서 새해 첫 일출 보기

벌써 6년 전 일이다. 가끔 들어가 보는 인터넷 커뮤니티에 다음과 같은 글이 올라왔다.

"연말에 제주도로 여행 갈까 하는데요. 제주도 여행을 혼자 가는 건 처음이라서요. 남자 혼자 여행 갈만한 장소를 추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로 몇 군데를 추천했다. 글쓴이는 내 댓글에 대댓글을 달아 궁금한 점을 물어봤다. 나는 다시 대댓글을 달고 또다시 대댓글이 달리고... 여행이란 게 가보면 '이런 거였구나' 싶지만 가기 전엔 모든 게 궁금한 법이다. 글쓴이의 궁금증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슬슬 귀찮아졌지만 이제 와서 모른 척 튈 수도 없고...

"그냥 저랑 하루나 이틀 같이 여행하실래요? 제 번호는 010-xxxx-xxxx'입니다. 저도 여행을 좋아해요. 편하게 연락 주세요."

그때는 몰랐다. 이 친구가 1년에 서너 번씩 자차를 끌고 내려와 2-3주씩 머물다 가는 명예 제주 도민이 될 줄은. (2주 전에도 내려와 지금도 제주도를 여행 중이다)

며칠 전 함께 한 여행에서 건진 사진

실제로 만나보니 나보다 다섯 살 정도 어린 후배였다. 여행을 마치고 저녁에 술을 한 잔 했는데 대화가 잘 통했다. 술김에 뜻밖의 제안 하게 됐다.

"새해 첫날에 따로 계획 있어? 1월 1일에 친구들이랑 한라산 정상에서 일출 보러 가기로 했는데 같이 갈래?"

"한라산 정상에서 일출을 볼 수 있어요?"

"딱 그날 하루만 새벽에 개방해.(지금은 예약제로 변경됨) 며칠 전에 한라산에 눈이 많이 서 꽤 볼만할 거야. 대신 새벽 3시엔 출발해야 하니까 갈거면 준비 단단히 하고 와."

"네. 끼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새벽 3시, 한라산 성판 출발. 칠흑같이 캄캄한 밤이었지만 달빛 만으로도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암흑을 가르는 헤드라이트와 적막을 깨는 발소리, 간간이 들려오는 등산객들의 대화소리, 폐부까지 들이차는 들숨과 또렷한 입김으로 흩어지는 날숨. 온몸의 감각세포가 촉수를 곤두 세우고 누구의 감각이 더 예민한지 대결을 펼친다면 이런 느낌일까. 순백의 세계 속, 모든 것이 선명했다. 점점 묵직해지는 허벅지 통증이 아니었다면 꿈이라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세 시간의 산행 끝에 한라산 정상에 도착했다. 정상은 우리보다 먼저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없었고 우리는 몇 백 미터를 내려와 시야가 탁 트인 일출 명당을 찾아냈다. 편평한 바위위에 걸터앉아 따뜻한 커피를 한 잔 하며 차가운 몸을 녹였다. 이제 기다림의 시간이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고 누가 말했나. 이제 더는 어둠이 짙어질 수 없겠다 싶을 때 저 멀리서 여명이 밝아왔다. 어둠의 시간이 가고 빛의 시간이 왔다.

"나온다!"

새해 첫 해가 떴다. 구름 위로. 그제야 실감했다. 우리가 구름 위에 올라와있음을. 사실 그때까지 나는 새해 첫 일출을 보며 소원을 비는 건 사람들의 의미 부여일 뿐이라며 새해 첫 일출 대신 새해 첫 꿀잠을 선택하는 사람이었다. 새해 일출보다는 올해 마지막 일몰을 보며 내년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리라, 다짐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구름 위에서 새해 일출을 볼 수 있다면 내년 새해의 첫 꿀잠도 포기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다. (그로부터 다시 몇 년째 내 의지가 꿀잠에게 지고 있는 건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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