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야 빛바랜 추억이지만 나도 한때는 마술 꿈나무였다. 대학교 4학년 때는 마술 동아리 친구들과 함께 유료 공연을 하고 그날 번 수익금으로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내한공연을 보러 갔을 정도로 나는 마술에 진심이었다. 그때가 임용고시를 6개월 앞두고 있을 때였으니 지금 봐도 제정신은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의 나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임용고시는 떨어지면 다시 볼 수 있지만, 카퍼필드가 우리나라에서 공연을 하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 수도 있기 때문에.
사실 '혼자 독학으로 마술을 하다가 옆대학 마술 동아리 회장에게 스카우트되고, 카퍼필드의 공연을 보러 갈 돈을 모으기 위해 함께 유료 공연을 열자는 제안을 받고, 공연을 성공시키기 위해 합숙 훈련을 하고, 티켓을 팔고, 실제로 공연을 하고, 티켓 수익을 모아 카퍼필드의 공연을 보러 간다'는 계획 자체가 마술 같은 일이었지만, 카퍼필드의 공연을 눈앞에서 볼 수 있다는데 뭔들 못하겠나. 이번만큼은 카퍼필드의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현실이다.
- 데이비드 카퍼필드
그의 말대로 상상은 현실이 됐다. 우리는 공연을 성황리에 마무리했고, 나는 데이비드 카퍼필드의 공연을 20만 원짜리 VIP석에서 봤고, 6개월 후 시험에도 합격했다. (다만 날 스카우트 해준 마술 동아리 형이 훗날 세계를 누비는 마술계의 거물이 될 줄은 상상 못 했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데이비드 카퍼필드를 사적으로 만난다나. 그때도 집에서 공연용 비둘기를 키우는 걸 보고 이 형은 마술에 모든 걸 걸었구나 싶었는데 역시 한 우물만 깊게 파면 뭐라도 되긴 하나보다)
아무튼 대학 시절의 절반 정도를 마술에 통째로 갖다 바친 끝에 대학 내에서는 본의 아니게 유명인사가 되어버렸고 어딜 가든 마술 한 번 해보라는 요구를 많이 받게 되었다. 그때마다 나는 손목에 걸린 고무줄 2개를 꺼내 3분짜리 길거리 마술 공연을 열었다. 고무줄이 손가락 사이에서 이동하고, 고무줄이 다른 고무줄을 통과하고, 고무줄 2개가 1개가 되고, 그 고무줄을 잘랐다가 눈앞에서 이어 붙이고... 이쯤 되면 이미 상대방의 혼이 반쯤 나가 있는데, 이때 화룡점정을 찍는 마술이 '고무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는 반지' 마술이었다.
이 마술사의 이름(쎄로)을 안다면 당신은 마술계의 고인물
"과학 시간에 모든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고 배웠죠? 그 이유가 뭐죠? 그렇죠. 중력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마술사입니다. 상상을 현실로 바꾸는 직업이죠. 지금부터 여러분의 상상력을 반지에 모아주세요. 이제 제가 이 반지에 '후~' 하고 바람을 불면 놀라운 일이 펼쳐질 거예요."
(잠시 후 반지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간다)
이 마술이 신기한 건 상식을 깨기 때문이다. 모든 물체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진다고 배웠는데 눈앞의 반지가 고무줄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네? 이런 마술 같은 일을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는 곳이 제주도에 존재한다면 믿겠는가?
내가 이곳을 알게 된 건 초등학생 때였다. 그날 나는 부모님의 차를 타고 제주시를 향하고 있었는데, 도로의 어느 지점부터 앞에 있는 차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걸 봤다.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차를 세우고 차에서 내렸다. 사고가 났나? 아무리 봐도 사고가 난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한빛아, 여기가 신비의 도로라는 곳이야. 도깨비도로라고도 하지. 네가 보기엔 눈앞에 보이는 길이 오르막길 같아? 내리막길 같아?"
"당연히 오르막길이죠"
"지금부터 잘 봐. 아빠가 차 시동을 끌 테니까 차가 어디로 움직이는지 유심히 관찰해 봐"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차가 거북이보다 느린 속도로,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움직였다! 그제야 이 도로에 차들이 멈춰 선 이유, 이 도로가 신비의 도로 또는 도깨비 도로라고 불리는 이유를 알게 됐다.하지만 이해는 되지 않았다. 여기가 실제로는 내리막길이라고? 눈 씻고 봐도 오르막길인데???
그땐 어린 마음에 저 오르막의 끝에 차를 끌어당기는 자석이 있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 가설은 잠시 후 도로 위의 호기심 많은 누군가에 의해 깨지게 된다. 그는 도로 위에 일부러 물을 쏟았는데 그 물이 위로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빠, 차가 왜 위로 올라가는 거예요?저기 물은 또 왜 올라가는 거죠?"
아버지는 착시현상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하셨다. 우리 눈에는 주위환경 때문에 오르막길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리막길이라나.
마술을 하다 보면 해법을 알고나서 더 답답해지는 경우가 있다. 이걸 연습하려면 도대체 얼마나 연습해야 할까, 해낼 수는 있을까 싶을 때의 답답함. 신비의 도로에서 일어나는 현상이 착시현상 때문임을 알았을 때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차라리 저 위에 만물을 끌어당기는 물체가 있다고 하면 믿는 시늉이라도 하겠습니다. 여기가 어딜 봐서 내리막길이냐구요.
기어코 비밀을 밝혀내고야 말리라는 심정으로 온몸의 감각세포를 살려걸어봤다. 살짝 오르막 같기도 하고 평지 같기도 하고 눈 감고 걸으면 내리막길 같기도 하고... 아, 모르겠다.(나는 아직도 신비의 도로를 지날 때면 이곳이내리막길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이쯤 되면 내가 믿는 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여기가 현실인지 가상세계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나비가 장자인 건지 헷갈리다가 결국 하나의 결론에 닿게 된다.
착시현상? 그래,가끔은 이렇게 마술 같은 일도 일어나야 인생이 살 맛 나지. 쿨하게 착시현상 인정!! (신기하게도 이렇게 인정하고 나면 내리막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신비의 도로 위에서 자동차 시동을 껐을 때 스르륵 올라갈 때의 느낌이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 레일 위로 올라가는 느낌과 비슷한 건 여전히 설명을 못하겠다.
덧붙임 1)
신비의 도로는 1981년 발견되었다고 한다. 택시에서 신혼부부가 내려 사진을 찍는데 택시가 오르막길로 올라가는 걸 보고셋이서 기겁을 했고 그때부터 관광지가 되었다는 전설적인 이야기가 전해 내려 온다.
덧붙임 2)
여기 말고도 제주도 다른 도로에도착시현상이 일어나는 도로가 있다. 다만 신비의 도로처럼 오르막 각도가 가파르진 않아서 유명하진 않다.
덧붙임 3)
지금은 신비의 도로 따위엔 관심 없는 바쁜 현대인들을 위해 우회도로가 개설되었다. 덕분에 신비의 도로가 궁금한 분들은 여유롭게 마술 같은 순간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