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친동생처럼 지내던 후배와 술을 한잔하는데, 술이 얼큰하게 취할 때쯤 후배가 나에게 진지하게 한마디 했다.
“형 보면 항상 느낀 게 있었는데요. 형은 참 행복해보여요. 저도 늘 웃고 다니니까 행복해보이죠? 사람들은 웃음 뒤에 감춰진 어둠을 몰라요”
눈빛이나 말투가 심상치 않았다. 평소 워낙 유쾌하고 밝은 모습만 보여주던 동생이어서 뭔가 있구나 싶었다. 다음 날이 사촌 결혼식이어서 술을 조금만 마시고 일찍 자야 했는데, 후배의 이야기를 더 들어줘야했다. 소주를 몇 병 더 시켰다. 우리는 밤새 술을 마셔야 했다. 서로가 가진 고통의 크기를 감당할 수 없어서. (다음 날 일어나보니 해는 중천에 떠있고, 부모님의 부재중 전화가 수십 통 와 있었다)
그동안 전혀 몰랐던 이야기였다.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사람이 죽을 때 그동안 느꼈던 슬픔과 기쁨의 무게의 총합을 재어보면 비슷하리라는 믿음은 그때 생겼다. 이제 내 차례였다. 후배가 다른 사람이 절대 알 수 없는, 마음속에 꽁꽁 숨겨둔 이야기를 용기 내어 꺼냈기에, 나도 누구에게도 꺼내지 않은 이야기를 꺼내야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걷던 그때 그 시간에 대해.
언젠가 빛이 비칠 거라는 희망조차 없었다. 다만 끝이 낭떠러지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나는 낭떠러지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고 있었다. 왜 하필 나에게 그런 시련을 주셨는지 수천 번, 수만 번 물었지만, 답은 없었다. 답은 이미 정해진 듯 보였다.
그때 나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밤에 잘 때마다 베개는 눈물로 젖었다. 지금 생각해도 평범한 사람이 견뎌내기엔 고통의 크기가 너무 컸다. 갈수록 더 심해지는 진행성이었고, 나와 같은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의 사례가 없다는 게,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이 없다는 게 가장 큰 고통이었다. 난 지금도 그때 내가 평생 겪어야 할 고통을 미리 다 겪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나를 안다면, 나의 글을 읽었다면, 그사이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지는 상상에 맡기겠다. 또 한 번의 삶이 ‘덤’으로 주어졌고, 그 이후로는 어떤 시련이 와도 웃으며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쓰나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어떤 파도가 와도 두렵지 않다. 그리고 니체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이 증명됐다.
“날 죽일 수 없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
- 니체
그 일이 무엇인지 구체적인 이야기는 꺼낼 수 없지만, 세상에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누구에게나 상처가 있고 사는 게 다 그런 거라고, 그러니 지금 빛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을 걷고 있다면 당신만 그런 게 아니라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결국은 다 지나간다고,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고, 그러니 ‘졸라 버티라’고...
나는 희망의 증거이고 싶다. 내 이름처럼, 암흑 저 너머에서 비치는 ‘한줄기 빛’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