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피 지망생 Jul 20. 2020

떠나고 싶은 날, 떠있고 싶은 날

그런 날이 있다.

이유 없이 떠나고 싶은 날. 사람에 치이고 싶지 않은 날. 세상과 멀찍이 떨어져 고 싶은 날.


이런 날을 대비해 작년에 사둔 패들보드 다.  패들보드가 뭔가 하는 분을 위해 설명하는 데 사진 한 장이면 충분하다. 이렇게 생긴 녀석이다.

패들보드 처음 탔던 날

평소엔 차 조수석에 찌부러져 있다가 떠나고 싶은 날 꺼내 공기를 주입하면 작은 배가 된다. 서핑보드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다. 서핑보드는 파도의 힘을 동력삼아 타는 원리라 파도가 있는 날만 탈 수 있지만, 패들보드는 파도가 없는 날도 장날이다. 노를 젓기만 하면 내가 가는 곳이 길이 된다.


요즘 장마기간이 길어지면서 볕 좋은 날이 드문데  간만에 햇빛이 비치니 오늘이다 싶었다. 블루투스 스피커에 좋아하는 음악을 담고 집 앞 바다로 향했다.


앉아서 노를 몇 번 저었더니 잘도 나간다. 때마침 노을이 다. 이제 오늘의 미션을 수행할 차례다.


바다 위에서 좋아하는 음악 들으며 노을 보고 멍때리기. (두 발은 바다에 담가주는 센스!!)


그렇게 한참을 떠 있었다. 패들보드 옆에 걸터앉아 두 다리 바다에 담그고 그새 멀리 떨어져버린 땅을 바라보고 있으니, 좋다. 그냥 좋다.


그렇게 멍 때리다 보니 사진 찍을 타이밍도 놓쳤다.

해가 제 집을 찾아가고 어둠 제 집을 찾아오고 나서핸드폰 카메라를 꺼내 들었는데...

기분이 너무 좋은 거다. 내 몸의 모든 감각세포 깨어나 춤을 춘다. 솔직히 흐르는 음악에 맞춰 보드 위에서 춤도 췄다. 

내 눈 앞에 펼쳐진 비현실적인 풍경(시각), 파도 부서지는 소리(청각), 바다 특유의 비린 듯 비리지 않은 내음(후각), 적당한 온도의 바닷물에 담긴 두 발의 감촉(촉각). 모든 것이 완벽! 시원한 맥주 한 잔 있으면 환상적이겠다 싶다가 이만하면 됐지 뭘 바라나 싶어 이내 마음을 접는다.


그렇게 2시간을 더 떠있었다.

'보드카 바이브'라 이름 붙인 내 플레이리스트가 끝날 때까지.(검정치마로 시작해 Sam smith로 끝날 때까지 2시간 반이 걸린다)

예상시간을 훨 초과하여 밤 10시가 되어서야 땅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내가 좋아하는 것들(좋아하는 음악, 노을, 별, 밤배, 밤바다, 바닷물의 부드러운 감촉)이 모여 시너지 효과까지 일으키는데 여기서 뭔가를 더 바라는 사람은 행복의 자격이 없다.

난 이기면 됐다.

내가 행복을 느낄때마다 나지막이 내뱉는 표현이다.


늘 말하지만, 행복은 돈이 아니다. 좋아하는 뭔가를 할 때 느껴지는 감정일 뿐. 그래서 좋아하는 뭔가를 아는 사람에게. 그런 게 여러 개 있는 사람에겐 행복해지는 것만큼 쉬운 것도 없다.


내가 땅으로 돌아온 이후로도, 밤하늘엔 별이 가득고 한치 배들은 부지런다. 다음에 또 바다에서 밤을 맞이해도 이 아름다운 풍경은 그대로 일거라는 뜻이다. 어떤 날은 오늘 뜨지 않은 보름달도 뜨겠지?

그때, 나만 저기 저 그림 속으로 들어가면 된다.


앞으로 자주 바다에 떠 있게 될 거 같다. 

렇게 또 하나의 행복이 늘었다.

이전 17화 그건 니가 덜 피곤해서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