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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온 Oct 22. 2023

돌아보니 어느새

여기까지 와 있었네.

어느덧 가을이었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이 빨갛고 노랗고 주황빛이었다.

어느새.


초록빛 사이로 반짝이는 빛 번짐 들을 손틈 사이로 벌려 보던 여름이 갔다. 찬 바람이 얼굴에 스치면 내 얼굴을 금방이지 벌게져버린다. 잠깐의 외출을 하고 들어간 화장실 거울 앞에선 나의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 피었다. 


제법, 아니 꽤나 하늘과 구름이 명료해졌다. 집에 박혀 나오지 않았던 날동안 지구는 열심히 돌고 돌아 가을을 데리고 왔다. 역시 나 빼고 세상은 잘도 돌아가는 듯했다.


조금의 용기로 그곳에 나왔을 땐, 서늘하고 맑은 가을이 안부를 물었다. 걸었고, 읽었으며, 조금씩 쓰기 시작했고,  집을 정리했다. 그럴 용기와 의지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무엇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와 함께 나의 글이 그곳에 멈춰있었다. 정말 많은 일들이 나에게 벌어지고 있었지만, 그것들을 견디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나는 벅찼다. 


하지만, 난 역시 글을 써야 되는 사람이기에 돌아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부유하는 문장들과 단어들을 뱉어야 한다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나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침대에서 일어나서 컴퓨터를 켜고 타자를 누를 수 있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당연하고도 쉬운 일이지만, 지금까지 좀처럼 그 일이 나에게는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하루 24시간 동안 깨어 있는 시간이 5시간도 되지 않을 때가 허다했고, 자느라 먹지도 씻지도 않았다. 죽은 사람처럼 잠만 잤다. 삶을 영위해야 하는 기본적인 것도 하지 않고서 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에겐 그게 살아있을 유일한 방법이었던 것 같다. 


퇴사를 했다. 아니, 퇴사를 당했다. 그동안 다녔던 회사와 달리 누구보다 열심히 일 했고, 나의 모든 것을 걸레 쥐어짜듯 쏟아내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사람 때문에 힘들고 공황이 찾아와도 이번엔 버텨보겠다고, 이번엔 절대 지지 않겠다고 이 악물고 버텼던 회사였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그리고 대인기피증으로 인해 1년을 못 버티고 퇴사했던 과거의 나와 달리 이번엔 꼭 무슨 일이 있든 버텨내고야 말겠다는 나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회사 그리고 사회는 냉철하다. 그리고 그게 맞다는 것을 느꼈다. 더 이상 함께 일 할 수 없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 배신감은 표현할 수 없었다. 길바닥에서 아이처럼 울었고, 팀장님을 원망했다. 하지만 곧 어쩔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다. 단맛이 빠져 더 이상 맛있게 씹을 수 없는 껌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더 이상 아무 생각을 할 힘이 없어 그대로 잠의 세계로 도망갔다. 적어도 자는 동안에는 굳이 안 해도 될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니까. (몰랐는데 선생님께서는 이 부분을 칭찬하셨다.)


오랜만에 밖에 나섰을 때 나의 안부를 묻던 가을에게 나는 장황하게 메모장에 이렇듯 답장을 했다. 이러나저러나 난 또 너를 만났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고 잊을만할 때 넌 다시 선뜻 안부를 묻겠지. 다음 가을엔 꼭 좋은 소식을 갖고 만나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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