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몇 가지 역할을 슬쩍 내려놓고 타이베이로 여행을 떠났다. 드디어 여행책자로만 보던 그 나라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가까운 이 나라가 지구 반대편 나라보다도 더 멀게 느껴졌다. 우울증은 여행이 나를 가슴 뛰게 했다는 걸 잊게 했다. 또다시 가슴이 기억을 해낼까.
타이베이는 한국과 일본이 적절히 섞인 익숙한 분위기였다. 정돈되고 편안한 느낌이었지만 예전 같은 설렘은 아니었다. 새로운 땅을 탐험할 때 호기심 가득하던 나의 열정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는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곳을 택한 것뿐인가?'
마음은 그냥 평온했다. 오로지 나로 있는 이 순간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생경한 풍경 아래 딱히 해야 할 일이 없는 내가 조금은 어색했다. 새벽 비행기를 타서인지, 긴장이 풀려서인지 모를 참을 수 없는 잠이 쏟아졌다. 풍등을 날리러 스펀으로 향한 첫날은 이동시간 내내 잠만 잤다.
천등을 날리기 위해 방문한 타이베이 근교인 스펀에 도착했다.
스펀은 사람만 한 천등에 소원을 써 하늘로 날리며 소원을 비는 장소로 유명하다.
내가 변화의 터닝 포인트로타이베이를 선택한 이유도 사실은 소원을 적은 풍등을 날리기 위해서였다. 소원적기는 내가 평상시에도 좋아하는 상상 놀이 중 하나다. 거기다 대문짝만 하게 적은 소원을 하늘에 띄워 준다고 하니 언젠가는 꼭 가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터였다.
사실 서울에서 올 때부터 풍등에 어떤 소원을 적을지 고민했었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바라는 걸 내게 묻고 또 물었다.
내 몸뚱이만 한 풍등 한쪽 면에 준비해 간 나의 소원 다섯 가지를 붓으로 정성 들여 섰다. 풍등의 네 면에 세 명이서 소원을 썼다. 남은 한쪽 면에는 다음엔 파리로 떠나자며 3초 만에 에펠탑도 그려 넣었다.
풍등 심지에 불을 붙이고 손을 놓으니 풍등이 보이지 않을 만큼 하늘 높이 올라갔다. 우리는 있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지금까지 얼렁뚱땅해 왔던 '글로 쓴 상상'이 정말로 현실에 나타나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내 소망도 하늘 높이 가닿았겠지’ 나는 창조의 법칙을 배웠고, 언젠가 모두 이루어질 것도 알았다.
여행 이틀째가 되니 그제 서야 가슴에 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풍등에 올려 보낸 내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나의 무의식이 믿기 시작한 것일까? 잊어버렸던 호기심의 세포가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내 마음이 설렘을 기억해 낸 것 같았다.
타이베이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달인 2020년 1월에 코로나19로 하늘길이 막혔다. 비행기가 다시 하늘을 날기 시작한 2023년 1월인, 3년 만에풍등 한쪽 면에 다음 여행지라며 무심코 그려 넣은 에펠탑도 보고 왔다. 이로써 여섯 가지 소원을 모두 이뤘다.
2024년 1월 풍등을 날리기 위해 다시 스펀을 찾았다.
아이들과 함께 스펀으로 가는 길에 내가 풍등에 적어 올린 소원이 이루어진 지난 스토리를 실감 나게 들려주었다. 소원 쓰기에 진지해진 아이들은, 한참을 공을 들여 빼곡하게 소원을 적었다. ‘남자 친구 생기게 해 주세요’라고 신중하게 쓰고 있는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