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걷는 산책로 호숫가에 능수버들이 하늘거리는 것을 보니 봄이 오긴 왔나 보다. 작은 뒷마당에는노지에서 무사히 겨울을 보낸 식물들이 반갑게 인사하고 얼었던 땅 사이론 새싹이 한참 얼굴을 내밀고 있다.
산책로 호숫가의 능수버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1월부터 봄에 심을 식물모종을 준비하느라 부산했다. 햇빛잘 드는 곳에서 씨앗을 파종해서 매일 아침 모종판을 확인하고 물을 주며 정성껏 관리했다. 하지만 새싹이 예쁘게 나서 설레는 마음은 잠깐이고 봄이 되기전에 반은 죽어갔고, 나머지도 정원에 옮겨심으면 생존율이 높지 않았다. 처음에는 내가 경험이 없고 실력이 부족해서 모종을 살리지 못한 것으로 생각했다.
나중에 살펴보니 꽃마다 피는 시기가 달라 너무 일찍 파종 한 씨앗들을 다 살리지 못한 것이었다. 그 후론 꽃들의 개화시기를 알고 그에 맞춰서 각각 다르게 파종했다. 대략 이른 봄에 피는 꽃은 2월부터 파종을 시작하고, 여름에 피는 꽃은 날씨가 따뜻해지는 4월에 씨앗을 뿌리는 방법으로 했더니 거의 정원에서 잘 살았다.
사랑초 씨앗파종과 꽃
처음에 미국 왔을 때 가장 적응이 안 된 점이 뭐든 서서히 바뀌는 것이었다. 내가 사는 동네도 거의 10년 전 그대로이다. 하다못해 집 현관문 열쇠도 최근에서야 디지털 키로 바뀌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도 열쇠를 사용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자주 방문하는 가든 센터에서도 제철이 되어야만 나오는 식물을 판매한다. 한국 SNS를 보면 계절을 앞당긴 예쁜 꽃들이 많이 나와 있어서 구입하려고 해도 살 수가 없다. 가서 물어보면 조금 더 기다리라는 말뿐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부모님의 결정에 따라 초등학교부터 서둘러 입학했다. 12월에 태어난 7살인데 엄마가 일찍 보내셔서 거의 2살 차이가 나는 친구와 학교에 다녔다. 성인이 되면 한두 살이 대수롭지 않지만, 어린 나이에는 좀 차이가 나지 않았을까? 만약 정상적으로 8살에 학교에 갔다면 좀 더 자신감있게 다녔을 거 같다는 생각도 했다. 결혼도 빨리했고, 아이도 빨리 낳았다. 나에게 주어진 생애주기별발달과업을 서둘러 완성하기 위해 늘 바쁘고 종종거리며 살았다. 그렇게 평생을 살다 보니 심각한 번아웃이 왔고 몸이 아파서 치료해야 했으며 결국엔 잘 나가던 사업도 포기했다.
그 시점부터 정원을 가꾸기 시작했고 꽃은 서두르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음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일찍 씨앗을 뿌려줘도 때가 되어야 꽃이 핀다. 그런가 하면 꽃이 질 때가 되면 작별 인사도 없이 일제히 사라진다. 나는 그것을 자연의 순리라고 생각한다. 인생에도 순리가있음을 정원의 꽃들을 키우면서 비로소 깨달았다. 내가 미리 알았더라면 좀 더 여유를 가지며 살았을텐데... 너무 서둘러 빨리 달리느라 놓친 아름답고 소중한 일상들이 아쉬움으로 남아있다.
살면서 서두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게으르지도 않게 삶의 속도를 조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시행착오 끝에 꽃씨를 적당한 시기에 뿌리는 요령을알게 되듯이, 나 또한 인생의 굴곡을 겪으며자연스럽게 터득하고 있다. 지금도 열심히는 살지만, 예전처럼 서두르지는 않는다. 이젠 우선순위가 무엇인지 알고 있어서다. 그래서계획대로 안 되거나 늦어져도 초조하지 않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마음을 다잡는다.꽃이 자기만의 시간에 꽃 피는 것처럼 서두르지 않아도 순리대로 될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