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순간 화가 안 나고 웃음이 났다. 페페가 잎 하나 상하지 않고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모습이 귀여워서였다. 흙이 거실 바닥 여기저기로 튀어서 청소하긴 좀 귀찮겠지만 예전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고 떨리지는 않았다.
바닥에 떨어진 페페 화분
사실 난 얼마 전까지 아침에 뭘 깨트리면 나쁜 일이 생길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 하루 종일 초조해지는 트라우마가 있었다.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 때의 일이다.
아버지가 갑자기 편찮으셔서 병원에서 검사했는데 의사가 너무 늦었다고 집에 가서 돌아가실 날을 기다리라고 하던 상황이었다. 엄마는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 와서 지극정성으로 돌보셨다. 아침마다 엄마가 직접 달여주신 한약을 아버지께 가져다드리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다. 그날도 여느 날처럼 아버지가 드실 한약을 가지고 가는데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빠져 한약이 든 그릇을 떨어뜨려 버렸다. 진한 밤색의 한약과 사기그릇이 깨진 화분처럼 바닥에 내동그려졌다. 그리고 하늘이 유난히도 파랬던 바로 그날 아버지가 우리 곁을 떠나셨다. 크리스쳔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지 않은 기운을 아버지께 드려서 일찍 돌아가신 거 같다는 생각에 괴로웠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아침에 뭔가를 떨어뜨리면 안 좋을 일이 생길 거라는 트라우마가 생겼다.
그렇게 오랜 기간을 지내다 식물을 키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아침에 자주 화분을 깨트렸다. 분갈이하면서, 물주다가도 또 어떤 때는 정원에 놔두면 비바람에 저절로 깨지기도 했다. 깨진 화분이 점점 많아지게 되자 이를 이용해서 나만의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래서 깨진 화분을 소재로 해서 인스타 피드에 올렸는데 반응이 너무 좋았다. 창의적이라는 칭찬 일색의 댓글이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이 달렸다. 그때부터 자연스럽게 아침에 무언가를 깨트리면 불안했던 트라우마가 서서히 없어지고 담담해지기 시작했다.
깨진 화분을 이용한 작품들
이번에 깨트린 페페 화분도 반쪽으로 두 동강이 나서 처음에는 쓸모가 없어 보였다. 그냥 버리려고 하다가 일단은 식물 작업실 한 쪽에 두고 지켜 보기로 했다. 며칠 오다가다 보니 언젠가 본 적이 있는 벽걸이 화분을 만들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거라지에서 작은 나무판을 가지고 와서 집 모양의 바탕 판을 그리고 남편에게 부탁해서 재단을 했다.
집모양으로 재단한 나무판
일단 디자인이 정해졌으니 재단한 나무에 깨진 화분을 놓고 여러 구상을 해봤다. 라벤더도 가져와 보고 분위기 있는 티슈페이퍼도 붙여봤다. 일단은 마른 꽃을 넣을 화병을 만들기로 하고 재단해놓은 나무에 하얀색 아크릴 페인트를 칠해 주었다. 군데군데 빈티지 느낌이 나도록 페이퍼로 닦아주었다.
여러 실험중
하얀색 페인트가 칠해진 나무판에 깨진 화분을 글루건으로 고정해 주고 벽에 달기 위해 구멍을 뚫어주었다. 깨진 화분이라 자칫 삭막해 보일 수가 있어서 테두리는 라벤더꽃 가루를 삥 둘러 따뜻한 느낌이 나도록 표현해 주었다. 간단하면서도 분위기 있는 벽걸이가 마음에 들어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완성된 벽걸이 화분 걸이에 말린 데이지와 라벤더를 넣어 주었는데 화분이 빈티지 느낌이 나서인지 마른 꽃이 이주 잘 어울렸다.
완성된 벽걸이 화분
완성된 작품은 인스타 피드에 올리기 위해 다양하게 연출해봤다. 햇살 비추는 식물 테이블 위에도 놔보고 라벤더 묶음과도 사진을 찍어 봤다. 물건을 구입할 때도 포장이 잘 되어 있으면 좀 더 눈길이 가듯이 잘 만든 작품도 사진으로 마무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작품이 사진으로 잘 표현되었을때 완성도가 크기 때문에 번거롭고 힘들어도 이 과정을 수십차례 반복한다.
벽걸이 화분 사진 촬영중
내가 만약 식물을 키우지 않았다면, 그리고 깨진 화분을 활용해 소품을 만들지 않았다면, 아직도 깨진 그릇 트라우마가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연히 다가온 식물이 나를 구해줬고, 소품 재창조를 하며 트라우마를 극복할 수 있었다. 어찌 살면서 이런 트라우마만 있겠는가? 진심을 다했던 일이 실패하기도 하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기도 하며 트라우마처럼 나를 부정적인 틀 안에 가두어 두었을지도 모르겠다. 화분의 재창조를 하며 이런 깨어지고 아팠던 경험조차도 딛고 일어서서 단단하고 멋진 인생으로 만들겠다는 깨달음도 갖게 된다. 매일 아침 습관처럼 자그마한 작업실에 앉아 화분에 꽃을 붙여주며 이젠 깨진 화분도 환영해! 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어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