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드너씨』
뉴욕에서 은퇴 후 새롭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쓴 글의 일부를 재수정한 글도 포함됐습니다.
글은 묘하다. 한 문장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오래전 길 위에 서 있다. 잊었다고 생각한 시간이 불쑥 다가오기도 하고, 희미했던 시간이 다시 살아나기도 한다. 신기하게 그 길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 아름답다. 기쁜 일이건, 슬픈 일이건. 다시 돌아갈 수 없어서일까.
단짝 친구와 함께 한 시간도 떠올랐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눈빛만 봐도 서로의 기분을 알던 친구다. 글을 쓰면서 나는 귀엽고, 당차고, 아름다웠던 그 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20화
198X년 9월 첫째 주 금요일 지하 연습실. 한 학기에 한번, 필수로 해야 하는 향상 음악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엄마의 감시가 없는 캠퍼스 생활을 즐기느라 연습을 소홀히 했다. 연주해야 할 곡도 못 외워서 마음이 급해졌다.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절친 K 도 마찬가지 상황. 우린 피아노 한 대와 몸이 겨우 들어가는 지하의 작은 연습실에서 하루를 불태우기로 했다.
연습하고 또 하다 보니 어느덧 저녁 7시. 그래도 집중한 덕에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는 겨우 외었다. 작은 종을 연상하는 영롱하고 빠른 멜로디가 고난도다. 휴!! 갑자기 허기가 밀려와 옆방의 K를 살피러 갔다. 그녀 역시 지친 표정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얼굴만 보면 알 수 있다. 오늘 연습은 여기까지라는 것을.
우리는 마치 약속이나 한 듯 악보를 덮고 연습실 문을 나섰다. 고풍스러운 음대 건물을 지나 휴웃길을 따라 내려왔다. 우리가 4년 내내 사랑했던 길이다. 휴! 하고 힘들게 걷다 보면 끝이 보여 웃음이 나는 길. 친구와 끝없는 이야기를 하며 쭉 내려가니 학교 정문이 보인다. 그곳에는 우리가 늘 찾던 분식점이 있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문을 여는 순간 익숙하고 낯익은 메뉴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야, 너 무슨 튀김 먹을 거야?'
김말이, 고구마, 오징어, 만두, 야채 튀김 중 무엇을 고를지 망설이는 순간, K는 고민도 없이 말했다.
“그냥 골고루 다 먹을래!”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내 마음도 그랬다. 모둠 튀김! 그 얼마나 푸짐하고 사랑스러운 단어인가? 튀김은 골고루 먹어야 제맛이지.
주방 이모가 커다란 기름 솥에서 노릇노릇 튀긴 튀김을 나무 바구니에 툭툭 담아 주었다. 고소한 냄새가 하루 종일 연습실에 갇혀 있던 우리를 위로해 준다. 사각, 사각, 와삭! 경쾌한 소리를 내며 튀김을 먹었다. '이건 힐링 푸드야' 하면서. 그러자 기름기가 촉촉하게 입안을 감싸며 퍼졌다. 짜지 않은 슴슴한 마법 간장에 찍어 먹으니 '아! '행복해!' 바로 이 맛이지! 노력한 후에 느끼는 뿌듯한 맛 말이야.
한 입, 두 입, 정신없이 베어 물다 보니 어느새 바구니는 바닥이 보이기 시작했다. 텁텁한 뭔가가 입안에서 느껴졌다. 기름기도 혀끝에 계속 남아 있다. 그 순간, K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느끼하지?"
'응'
"그럼 비빔국수로 입가심하자" 우리는 거의 동시에 카운터를 향해 손을 들었다.
"이모, 비빔국수 하나 추가해 주세요. 노란 단무지도 많이 주시고요!" 비빔국수에는 단무지가 필수지.
친구 몸매처럼 가느다란 면발이 돌돌 말아 담기고, 그 위에 빨간 양념장이 듬뿍 올라와 있었다. 새콤달콤한 무우무침과 달걀 반쪽이 곁들어졌다. 고소한 참기름과 깨소금까지 솔솔 뿌려져 있으니, 우리의 속을 개운하게 해주기에는 완벽하다.
늘 솔선수범하는 K가 먼저 젓가락을 들어 능숙한 손놀림으로 국수를 비비기 시작했다. 하얀 면발에 빨간 양념이 들어가니 금세 발그레해진다. 격한 운동을 하고 난 뒤 빨개진 얼굴처럼. 국수가 공평하게 양념을 머금었을 때, 우리는 동시에 젓가락을 들었다.
‘호로록.’
국수가 혀를 스치자마자, 새콤달콤하고 알싸한 매운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순간, 조금 전까지 입안에 남아있던 기름진 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개운함과 칼칼함만이 느껴진다.
'캬!! 이게 바로 단짠단짠의 조화지.' 친구도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거들었다.
"튀김만 먹으면 느끼해서 질리고, 비빔국수만 먹으면 맵고 자극적이지. 둘이 만나야 조화로운 거야."
나는 젓가락으로 국수를 말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게. 우리 인생도 이렇겠지?’
그때는 별생각 없이 장난처럼 던진 말이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인생들이 뭘 알았다고 그런 말을 주고받았을까? 지금 이 나이가 돼서야 조금 보이는 것을.
그날 저녁, 우리는 학교 앞 작은 분식점에서, 완벽한 단짠단짠의 마법을 즐겼다. 인생도 그렇잖아. '단맛만 있으면 심심하고 짠맛만 있으면 힘들지. 매운맛도 필요하고, 가끔 기름진 날도 있어야 해. 그래야 진짜 맛있는 인생이 되니까.
40여 년이 다 되서야 그 시간을 다시 불러내니, 우리가 나눈 그 말들이 지금도 살아 숨 쉬는 것처럼 생생하다. 그래 맞아. 그때 나눈 말이 맞았어. 인생은 단짠단짠했어. 한때는 가시 같고 또 한때는 꽃 같았지. 분식점에서 먹었던 튀김과 비빔국수처럼. 글을 쓰며 잊고지낸 오래전 추억의 꽃 한 송이를 마주했으니, 글은 참 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