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전문 식당에 앉아 주문을 하려고 메뉴판을 펼쳤습니다.
잔치국수, 멸치국수, 해물국수, 고기국수, 비빔국수, 콩국수, 쟁반국수, 칼국수, 그냥 국수까지.
국수 종류가 이렇게나 다양한 줄 몰랐습니다. 게다가 냉면, 쫄면, 밀면도 국수 가문이라며 이름을 올렸습니다. 글로벌 시대를 반영한 듯 요즘은 쌀국수, 베트남 국수도 고개를 들이댑니다. 국수의 종류가 엄청 많아 뭘 먹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중에서 생소한 이름 하나가 눈에 띕니다. 다른 국수는 어떤 건지 대충 알겠는데 이 국수는 이름 가지고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습니다. 막걸리, 막노동할 때의 '막'자가 들어간 막국수였습니다.
국수 집안에 막장 드라마가 생긴 걸까요? 막국수가 왜 막국수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때마침 옆 테이블에 어떤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일행들에게 '라~떼는 말이야'라며 막국수 이야기를 한참 동안 신나게 늘어놓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는 말이야, 막국수가 그리 흔한 음식이 아니었어, 80년대쯤에 처음 먹어본 막국수는 그 쟁반 막국수였는데 국수를 접시에 담아 놓고는 알아서 비벼 먹으라고 하지 뭐야? 그때는 진짜 마음에 안 들었어. 차라리 안 먹고 말지, 뭘 이런 걸 다 먹냐 했지."라고 하면서도 가게 주인에게 막국수를 주문합니다.
속는 셈 치고 호기심 반 기대 반으로 막국수를 시켰습니다. 이윽고 국수와 육수가 함께 나온 막국수, 모양이 특이하지 않고 다른 야채나 양념도 유별나지도 않았습니다.
국수와 같이 나온 육수는 자기 취향대로 부어먹으면 된다고 합니다. 국물을 많이 부으면 물막, 적게 부으면 비막으로 먹는 거라고 하면서요. 강원도 음식답게 고명이나 양념장에 별로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 비교적 심심한 맛이라고 합니다. 강원도는 산이 많아 기후가 서늘하고 워낙 산골 오지라 소금이나 양념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그렇다는 게 이유였습니다.
맛이 자극적이지도 않았고 삼삼하다고 할까요? 강원도 전통 국수라는 기대가 너무 컸는지 몰라도 막상 먹어본 막국수는 그저 그런 밋밋한 느낌이었습니다. 젊은 층보다는 노년층 입맛에 잘 맞을 거라는 말이 맞는 듯합니다. 차라리 쫄면이나 시킬 걸 하는 후회가 살짝 들었습니다.
막국수를 한 젓가락 하던 옆 테이블의 아저씨는 동료들에게 막국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맛도 심심한 막국수를 어떻게 이야기할지 궁금하기도 하고 바로 옆 테이블이라 아저씨 목소리를 듣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막국수라는 이름은 '막(만든 지 얼마 되지 않는) 만들어서 막 먹는 국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모 방송에 나온 한 전통 막국수집 주인 할머니는 주문이 들어오자마자 지금 막 만든 국수라는 의미에서 막국수라고 불렀다고 말씀하십니다.
동네 주민들끼리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배가 출출해지면 당장에 메밀을 갈아 눌러먹기 시작한 게 막국수의 기원이라는 50여 년 전 신문 기사도 있었습니다.
강원도 음식이라고 알려져 있는 막국수. 막국수는 화전민의 애환이 담겨 있는 음식입니다.
강원도는 메밀을 많이 재배하는 곳입니다. 메밀은 척박한 땅, 식물이 자라는 양분이 부족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식물입니다. 화전을 3년~4년 해서 땅이 척박해지면 메밀 씨를 뿌리고 풍부한 메밀로 국수를 해먹었다고 합니다. 화전민들이 끼니를 때우려고 '마구' 뽑은 거친 국수가 막국수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막국수는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19세기 말 을미사변을 계기로 춘천 지역에서는 의병들이 일어났지만 모두 실패하고 일본군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일본군을 피해 가족과 함께 깊은 산으로 들어가 화전을 일구고 조, 메밀, 콩으로 연명해야만 했습니다. 나라를 잃은 후에도 그들은 화전을 떠나지 않았고 메밀을 수확해서 읍내로 들고 나와 팔기 시작하면서 춘천에 메밀을 이용한 막국수가 자리 잡았다고 전해집니다.
과거 춘천 지역 농촌에서는 특별한 손님이 오면 맷돌에 메밀을 갈아 메밀쌀을 만들고 디딜방아에 찧어 가루 낸 걸 국수를 뽑아 대접한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에는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여기저기서 국수를 만들어 팔던 게 대중화의 시초라고 합니다.
그러다 1960년 무렵 당시의 정계의 거물 인사들이 춘천에 가면 꼭 한 그릇씩 사 먹고 가면서 '막국수는 춘천'이라는 이미지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국풍 81' 행사에 춘천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막국수가 출품되면서 국민들도 막국수 하면 가장 먼저 춘천을 떠올리게 되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막국수의 막이 금방, 손쉽게, 아무렇게나라는 의미를 가진 접두사입니다.
막국수가 금방 아무렇게나 만들어졌다고 해도 막국수의 첫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아저씨는 당시에 이런 걸 국수 집안에 끼워줘도 괜찮은 건가 싶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막국수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되어버렸어. 예전에 강원도뿐만 아니라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막국수를 먹어보면 맛이 다 제각각이지. 서로 자기들이 원조라고 하고. 그래도 좋았던 건 거기에는 막국수를 만드는 사람의 삶이 느껴져서야."
아저씨의 말을 다 듣고 나니 막국수가 달리 보였습니다.
막국수를 처음 만들었을 때는 나라 잃은 설움을 딛고 살아남기 위해, 막국수를 팔았을 때는 전쟁통에서도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사실이 가슴 뭉클하게 합니다.
막국수를 만드는 사람의 삶이 느껴지는 이유, 막국수가 살아남기 위한 처절히 몸부림쳤던 아픈 우리 역사와 함께 해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올여름은 유난히 더운 정도가 아니라 매일매일이 찜통더위의 연속입니다.
오늘보다 더 무더운 날을 앞으로 얼마나 더 보내야 할지, 아직 7월인데 8월은 어찌 견뎌야 할지 생각만 해도 숨이 턱 막힙니다.
이렇게 더울 때는 시원한 것이라면 뭐든지 눈앞에 막 불러냅니다.
나라 잃은 터전에서, 전쟁통에서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막국수, 그런 막국수라면 더위 정도는 문제도 아니겠죠? 시원한 막국수 한 젓가락으로 무더운 더위를 막 날려버렸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