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템포 쉬어가는 여유

느림의 미학

by 공감의 기술

오랜만에 만난 사람과 인사를 나눕니다. 언제부터인가 '안녕하세요'만큼 흔하게 쓰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요즘 많이 바쁘시죠?"

바쁘다고 대답해야 나도 세상을 제대로 사는 듯한 기분이 들고, 바쁘지 않다고 하면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보일까 봐 우물쭈물하다 어정쩡하게 바쁘다고 대답하곤 합니다.


할 일이 없어 빈둥거리며 뭐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하던 차에 전화벨이 울립니다. 모르는 번호, 혹시나 반가운 사람이 아닐까 하는 기대로 전화를 받습니다. 하이톤의 밝은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들려옵니다.

"고객님은 000만 원까지 대출이 가능하십니다"로 시작되는 대출광고 전화였습니다. 순간 실망하며 이런 말로 전화를 끊습니다.

"지금 바빠요."


친구와 저녁에 소주라도 한잔하고 싶어서 전화를 합니다.

받자마자 "왜?"라는 간단하게 대답하는 친구, 나도 용건만 간단하게 말합니다.

"바쁘냐?"




요즘을 사는 우리는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갑니다. 바쁘지 않은데도 바쁜 척해야 밥만 축내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바쁘다고 느껴야 뒤처지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바빠야 한다는 생각은 여가 시간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주말 동안 오래간만에 늦잠도 자고, 놀러 가서 재미를 만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이렇게 놀아도 되는 걸까?' 하는 의아한 생각이 밀려듭니다. 다들 지금 내일을 위해 열심히 뛸 준비를 할 텐데 나만 노는 것 같아 그때부터 괜히 신경이 쓰입니다. 길지 않은 휴식 시간도 생산적으로 보내야 한다는 강박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결과이기도 합니다.


'성공하고 싶다면 1분 1초도 허투루 보내지 말고 바쁘게 지내라'

'행복하고 싶다면 시간을 아껴 원하는 일을 바쁘게 하며 행동하라'

'우울하다면 억지로라도 더 바쁘게 움직여라'

'걱정이 든다면 걱정할 틈이 없게 더 바쁘게 살아라'.

자기 계발의 대가들은 어느 누구나 할 것 없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바쁘게 지내라고 조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바쁘게 지내려고 합니다. 할 일이 많이 있을 때는 말할 나위가 없고 설령 바쁠 일이 별로 없다 싶으면 일부러라도 더 바쁘게 보이려고 오버를 하곤 합니다.


일상에서 바쁘게 사는 모습은 흔하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3초 뒤면 문이 열릴 엘리베이터 버튼을 수도 없이 누릅니다.

3분이면 조리되는 컵라면을 기다리지 못해 다 익지도 않은 채로 젓가락질을 합니다.

신호등이 빨간불 신호로 곧 바뀌기 직전인데도 가속 페달을 밟아 쏜살같이 지나갑니다. 횡단보도 파란불이 곧 꺼진다고 깜빡깜빡거리는데도 100미터 전력 질주를 하듯 전속력으로 뛰어갑니다.

관광지에 놀러 가면 여기저기 구경하며 즐기기보다는 사진부터 찍고는 다음 장소로 곧바로 이동합니다.

산을 올라가는 길은 옆에 뭐가 있는지 관심 없이 오로지 산 정상을 향해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숨을 헉헉거립니다.




하지만 바쁘게 산다고 그리 달라지는 것도, 얻는 것도 없습니다.

버튼을 수없이 눌러도 엘리베이터는 때가 되어야 열리고 닫힙니다.

3분을 참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휘저은 컵라면은 설익은 채로 먹습니다. 서서 걸어가면서요. 그러다 소화불량에 시달리곤 합니다.

깜빡거리는 신호등을 쏜살같이 통과했지만 며칠 뒤 신호위반 딱지가 날아옵니다. 마음은 전력 질주, 몸은 슬로비디오, 결국 한 번에 못 건너고 중앙선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뻘쭘하게 서있기도 합니다.

분명 유명 관광지에서 찍힌 사진에는 내가 폼 잡고 서 있습니다. 그런데 사진 말고는 암만 생각해도 제대로 기억나는 장면이 없어 진짜로 다녀왔는지 의아해합니다.


느리다는 건 게으름이라고 여깁니다. 무기력하다고 치부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무조건 앞서가는 바쁨에서 찾아볼 수 없는 느림의 미학이 있습니다. 느림은 바쁘게 재촉하는 일상에 휩쓸려가지 않겠다는 의지이기도 하고요, 빨리빨리 속에 나를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결심에서 나오는 행동일 수 있습니다.

바쁜 빠름이 인생 목표의 전부인 양 '바쁘다 바빠'를 외치고 다니지만 삶에서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바쁨도, 빠름도 아닌 느림입니다. 사람을 만나 차근차근 이야기를 나누어야 마음을 얻고,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는 여유가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 줍니다. 일도 천천히 꼼꼼하게 챙겨야 실수 없이 처리 가능합니다. 한가로이 거닐고, 아무 생각 없이 불을 보고 물을 보며 하늘을 보는 멍 때리는 시간이 힐링이 되기도 합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 버린다는 삶입니다. 길어봤자 백세 남짓한 인생, 주어진 시간이 한정되어 있는데 빨리 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습니다.

조급한 마음은 한시름 내려놓고, 빠른 속도는 한 템포 늦추고, 어려운 문제는 한 발짝 물러서는 느림의 미학이 소박한 삶의 기쁨을 가져다주고요,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해 줍니다.




바쁠 일도 별로 없는데 바쁜 척하고 지내려니 누군가의 한마디에 가슴이 뜨끔합니다.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사람은 별로입니다. 어차피 자신이 가진 시간의 총량은 모르지 않습니까? 그러니 나누면서 살아도 아깝거나 억울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그런데도 다들 왜 그렇게 급하게 바쁘게만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가진 시간이 얼마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바쁘게 지낸다고 여유마저 없을 이유는 없습니다.

바쁜 건 괜찮은데 여유가 없는 건 안 괜찮습니다.

바쁘지도 않으면서 여유까지 없는 건 더더욱 괜찮지 않습니다.


천천히 느리게 즐길수록 가슴에 남는 추억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빨리빨리 급하게 사는 인생일수록 머리에 남는 건 텅 빈 망각뿐입니다.

무엇보다 마음의 여유가 좀처럼 생기지 않는 게 고민인 요즘입니다.

바쁠수록 조금만 천천히, 한 템포 쉬어가는 여유, 느림의 미학을 배우고 싶습니다. 






사진 출처,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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