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일락, 허수경
라일락 꽃이 피기 시작했다
마당 구석에 두고 잊어버렸지
죽어버릴 줄 알았던 나의 라일락
내게로 온 게 한 그루
당신에게 간 게 두 그루
오랜만에 만난 나의 라일락
꽃이 피다니
너는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았구나
당신의 라일락은 죽었을까
내게로 온 라일락만 살아남은 걸까
지나고 나면 뒤돌아보게 하는 라일락 향기처럼
뒤늦게 꽃을 피운 라일락처럼
꽃이 피었으니 웃어야지
그렇게 다시 망가져야지
이 봄이 여전히 추운 건
계절조차 망가져버렸는지도
라일락을 내려다보며 바보처럼 울어버렸지
쭈그리고 앉아 오래오래 라일락을 바라보았지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라일락,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