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나의 라일락

라일락, 허수경

by 하리

라일락 꽃이 피기 시작했다

마당 구석에 두고 잊어버렸지

죽어버릴 줄 알았던 나의 라일락

내게로 온 게 한 그루

당신에게 간 게 두 그루

오랜만에 만난 나의 라일락

꽃이 피다니

너는 그렇게 죽지 않고 살았구나


당신의 라일락은 죽었을까

내게로 온 라일락만 살아남은 걸까

지나고 나면 뒤돌아보게 하는 라일락 향기처럼

뒤늦게 꽃을 피운 라일락처럼

꽃이 피었으니 웃어야지

그렇게 다시 망가져야지

이 봄이 여전히 추운 건

계절조차 망가져버렸는지도


라일락을 내려다보며 바보처럼 울어버렸지

쭈그리고 앉아 오래오래 라일락을 바라보았지







라일락

어떡하지,

이 봄을 아리게

살아버리려면?

신나게 웃는 거야, 라일락

내 생애의 봄날 다정의 얼굴로

날 속인 모든 바람을 향해

신나게 웃으면서 몰락하는 거야


라일락,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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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