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남하린 Mar 09. 2024

N번째 자기소개서

아이엠 그라운드 자기 소개하기


요즘 나의 하루 일과는 아주 단조롭다. 따뜻한 이불속에서 뭉그적거리며 늦장을 부리며 자다가 오전에는 발레 학원에 간다. 학원에 다녀오면 점심으로 배달음식을 시켜 놓고 배달이 오는 동안 샤워를 한다. 점심 메뉴는 베이글 샌드위치나 아사이볼 혹은 포케. 가끔 식욕이 왕성할 때는 삼겹살 김치볶음밥이나 치즈 돈가스를 시키곤 한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집을 정리하다가 대충 옷을 주섬주섬 주워 입고 노트북을 챙겨 집 앞 카페로 간다. 메뉴는 역시나 둘 중 하나. 날씨가 추우면 따뜻한 유자 레몬티, 더우면 차가운 유자 레몬티. 음료를 시킨 후 노트북을 켜고 이력서와 포트폴리오를 수정하고 자소서를 쓴다. 또 채용 사이트에 들어가 지원할 만한 곳을 스크랩하고 다시 새로운 자소서 쓰기의 반복.


다른 건 참을 만한데 문제는 바로 '자기소개서'. 몇 번이나 썼다고 벌써 물릴 지경이다. 앞으로 수십 아니 수백 번은 더 써야 할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부터 자기소개 시간이 제일 끔찍했다. 내성적인 성격에 남들 앞에서 말도 잘 못하는데, 고작 몇 분 안에 나를 설명하라니. 심지어 가장 난감한 항목은 바로 ‘지원 동기’다. 합격 자소서를 보면 다들 처음부터 이 회사를 들어가기 위해 살아왔던 것 마냥 술술 잘만 쓰던데. 아니 대체 입사에 거창한 운명적 이유 따위가 어디 있단 말인가. 글을 쓰는 걸 좋아하는 나지만 이런 나 역시 자기소개서가 가장 힘들다.


쓰면서도 속으로는 끊임없이 ‘당신이 정말 궁금해하는 건 이게 아니지? 어떤 대답을 좋아해?’ 하면서 내가 아닌 당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과정. 그냥 솔직한 심정으로는 이렇게 쓰고 싶다. “안녕하세요 저는 곧 졸업예정인 대학생이고요, 쥐뿔도 없지만 취직만 시켜 주시면 무엇이든지 열심히 하겠습니다.” 게다가 관계도, 사람도, 글도 솔직하고 담백한 것을 선호하는 나에게 끊임없이 증명하고, 어필하고, 그럴듯하게 부풀려야 하는 작업은 정말 고역이다. 고요히 스며들어 매력을 알리는 내 성향과 다르게 정해진 분량과 시간 내에 빠르게 자신을 어필해야 하는 점까지도. 이 정도면 취준과 나는 전생에 원수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뭐 하나 맞는 게 없는 듯이 느껴진다.


가장 우울한 것은 취업에 성공해도 과연 내 인생이 행복할까 하는 의문점이다. 처음엔 기쁘다가도 결국 이제 남은 인생의 대부분을 월화수목금 일만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과연 이게 진심으로 기뻐할 일인가 하는 의문. 내가 진정 바라던 삶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점점 잊혀만 가는 것 같다. 정말 기억이 안 나는 건지, 애써 지운 건지. 살면서 그토록 치열하게 노력했던 모든 순간들이 결국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고 생각하면 피식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망하긴 하다. 겨우 이 정도 가치는 아니었는데. 당시의 내겐 뼈를 깎는 고통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인내의 시간이었는데, 내가 얼마큼 성장하고 변화했는데. 그게 고작 내 자소서의 한 줄짜리 분량도 못 채운다니.


누군가는 대답해 줬으면 좋겠다. 불합격 통지서를 볼 때마다 왜 내가 살아온 지난 발자취가 모두 헛된 것 마냥 느껴지는지, 내 지나온 삶이 부정 당하는 느낌이 드는지, 나를 소개할수록 나는 왜 점차 지워져 가는 기분이 드는 건지 말이다.

이전 02화 페르소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