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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묘보살과 민바람 Oct 17. 2024

장래희망은 편의점 인간

편의점과 동기화 89% 진행 중

 한 독자분이 내 첫 책을 읽고 떠오른 소설이 있다고 하셨다. 무라타 사야카의 《편의점 인간》. 주인공 후루쿠라 게이코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는 점도 그렇고, 나이도 그 책을 쓴 당시 내 나이와 비슷했다. 그리고 독특한 행동거지를 가지고 있어 '보통 인간'에 섞여들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언행을 열심히 학습하는 점도 ADHD를 가지고서 보통으로 보이려 애쓰며 살았던 내 모습과 겹쳐 보인다.


 편의점에서 일한다고 '편의점 인간'이라고까지 하는 건 무리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책을 읽고 나서는 생각이 바뀌었다. 주인공 게이코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18년째 같은 편의점에서 일하고 있다. 그간 만난 점장만 해도 8명이다. 그는 늘 편의점 음식으로 끼니를 때우고, 매뉴얼에 맞게 정리된 점포의 상태와 "어서 오십시오!"라는 인사에서 평안을 느낀다. 편의점이 되고 싶어 하는 형태, 가게에 필요한 것 등 편의점의 '목소리'가 쉬지 않고 들려오고 소리들에 반응하여 저절로 몸이 움직인다. 심지어 편의점에 있지 않을 때도 편의점과 연결감을 느끼는 경지에 있다.


 게이코는 이렇게 말한다. "내 모든 세포가 편의점을 위해 존재하고 있다고요." 이렇게 편의점과 일체화되어 있고 "편의점 점원으로 '태어나기' 전의 일은 뭔가 어렴풋해서 선명하게 생각나지 않는" 이 사람은 '편의점 인간'임에 틀림없다.


 18년 경력이라니! 총 경력 4년 반인 내가 좀 쫄린다. 하지만 이미 나도 편의점과 일체화되어 가는 게 느껴진다. 예를 들어 점포 안을 돌아다니며 일하다 보면 매대에 가려 손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때 덜펑, 하는 소리가 들리면 버튼 눌린 듯 하던 일을 놓고 계산대로 향하게 된다. 이건 음료가 들어있는 워크인 냉장고 문이 닫히는 소리인데, 손님들이 보통 차갑고 무거운 냉장음료를 계산 직전에 고른다는 것을 내가 몸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편의점에서 오래 일하다 보면 어떤 감이 생긴다. 들어오기 전 손님의 분위기만 봐도 담배만 사서 나갈 손님인지 천천히 물건을 고를 손님인지 대충 알 수 있다. 담배 손님들은 걸음걸이에 거침이 없고 손에 휴대폰이나 카드를 꺼내 들고 있으며 좀 급해 보인다. 습관처럼 동작을 수행하는 확신과 가벼움이 행동거지에 스며있어서, 담배 이름을 찰떡 같이 알아듣고, 250종의 담배 속에서 단번에 그것을 골라내고, 바코드를 찍고 시원스러운 "결제 됐습니다" 멘트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조금도 지체해서는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을 불러일으킨다. 다행히 나는 대부분 그것을 해낸다. 글로 적으려니 차이점을 따져보게 됐지만, 이건 판단보다는 같은 일을 반복해서 겪다 보니 생긴 무의식에 가깝다.


 점포 안에 아직 손님이 있는 상태에서 백룸, 그러니까 창고에 들어가 재고를 찾을 때도 이런 무의식적 능력이 발휘된다. 웬만하면 손님이 "계산이요!!"를 외치기 전 밖으로 나가 계산대에서 대기하는 게 내가 부여한 나의 미션이다. 그렇다고 너무 일찍 나가서 기다리면 시간 운용의 효율이 떨어진다. 손님은 쉴새없이 오고 물건은 계속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손님이 물건을 들고 계산대로 걸어오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에 창고 문을 열고 점포로 들어서면 나이스 타이밍. 이르면 내가 답답할 수 있고 늦으면 손님이 짜증날 수 있다. 순전히 감으로만 나갈 타이밍을 잡는 건데, 창고에 들어오자마자 손님이 부를 때도 있지만 이때쯤이 아닐까 하는 느낌에 나가보면 얼추 맞을 때도 많다. 이 육감이 더욱 발달해서 손님이 안 오는 틈만 골라 화장실에 다녀올 수 있는 초능력이 만들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일종의 직업병도 생겼다. 다른 가게에 손님으로 가서 물건을 고를 때, 물건 팔린 자리가 비어 있으면 나도 모르게 손이 올라간다. 뒤에 있는 물건을 앞으로 당겨 정리하고픈 충동이 올라오는 것이다. 멈칫하고 애써 손을 내린다. 아마추어처럼 왜 이래? 돈 받을 때만 일하자구. 그래도 상품을 내가 집어 생긴 빈 자리는 채워둔다. 원래 있던 빈 자리는 그렇다 쳐도 내가 만든 빈 자리는 도무지 두고 떠날 수가 없는 것이다. 볼일 보고 물을 안 내리고 나가는 것처럼 찜찜하다. 책을 읽다 틀린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발견했을 때의 느낌과도 비슷하다. 나는 오랫동안 문장 첨삭 일을 해온 버릇이 있어 출간된 남의 책도 오탈자를 연필로 고쳐두지 않고선 못 배긴다. 몸 어딘가 벌레가 기어다니는 듯 근질근질한 느낌, 신발 안에 작은 돌이 들어가 밟히는 느낌이다. 가게에 들어설 때도 방심하면 손님인 내가 가게 보는 분께 "어서 오세요!"를 외치고 싸한 분위기를 온몸으로 감당하니, 내 손님 자아는 점원 자아에 밀려났구나 싶다.


 하지만 점원 자아일 때 손님 자아가 나오기도 한다. 매대 상태를 확인하는 게 곧 윈도 쇼핑이어서 괜찮은 물건이 들어왔다 하면 일단 점찍어둔다. 마트나 시장에서 식재료를 사기도 하지만 편의점에서 적당히 장을 보는 건 나만의 장보기 꿀팁이다. 편의점 물건이 마트보다 비싸다는 인식이 있는데, 행사를 잘 활용하면 마트보다 싸게 살 수 있다. 우리 점포는 마트에 들어가는 정육과 채소, 과일도 같이 취급하고 있다. 수박도 팔고 메론도 팔고 코코넛도 팔고... 정말 별 걸 다 판다. 덕분에 나도 집에서 먹을 과일과 구황작물, 고기를 점포서 일하면서 골라간다. 이것도 월루라면 월루. 별 거 아닌데 일하면서 쇼핑하는 기분이 꽤 달다. 사무직으로 치면 근무 중에 온라인 쇼핑을 하는 기분이랑 비슷하려나.


 결제를 할 때는 편의점 어플 적립과 휴대폰 통신사 할인, 지역화폐 할인을 같이 받는 게 일반적인 절약 방법이다. 그런데 이따금 흔한 1+1이 아니라 새로 나온 인기상품인데 품질도 좋고 지금 딱 필요한 물건이 파격행사를 할 때가 있다. 이런 녀석들을 몇 개 낚아서 퇴근할 때는 하루가 더 알차다. 편의점 직원이라서 누리는 소소한 특권이랄까.


 소소한 특권,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게 또 있다. 유통기한이 다 된 상품은 바코드를 스캔해서 '폐기' 상품으로 등록하고 버리는데, 어차피 버려지는 음식들이니 폐기를 한 사람이 먹거나 챙겨가도 된다는 게 편의점 업계의 국룰이다. 폐기 상품이 무슨 특권이랄 게 있나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아직 신선한 데다 내 시급 정도 되는 상품을 그냥 받아갈 때는 그것도 재미가 쏠쏠하다. 주로 나오는 폐기 상품은 유제품이나 삼각김밥, 도시락, 샌드위치와 햄버거, 소시지나 핫바 같은 가공육류지만 신선 식품 매대가 있다 보니 소불고기나 항정살, 연어 같은 높은 가격대 상품이 폐기될 때도 많다. 천사 같은 우리 점장님들은 괜찮은 폐기 상품이 나오면 따로 뒀다가 나에게 챙겨주곤 하셨다.

 

 고기를 사는 버릇이 없는 내 손에 불고기나 삼겹살, 목살 같은 게 들어오면 그날 저녁은 동거인과 고기 파티를 했다. 집에 도착하면 나는 입으로 효과음을 넣어가며 편의점에서 수렵하고 채집해온 것들을 꺼냈다. 최근 예능에 나왔던 신상 도시락, 반값할인 중인 주전부리, 유통기한이 갓 지난 싱싱한 폐기 상품 등 물건 하나하나 자랑스럽고 신나게 꺼내놓는 나를 보며 그는 실소와 폭소를 오가곤 했다.


 치킨을 튀기느라 몸에 밴 기름 냄새를 한껏 뽐내며 이게 바로 샤넬 넘버 파이브가 아닌 '지에스 넘버 트웬티 파이브'라고 자랑하면 그는 이런 신박한 헛소리가 다 있나 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나의 편의점 자긍심을 존중한다는 듯이 깊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나도 '편의점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 편의점 인간이 되고자 한다. 나에게 직장으로서 편의점 만한 곳은 또 없으니까. 편의점 일은 내 또 하나의 천직이니까. 전업 작가로 살 수 있게 되지 않는 이상은 내내 편의점에서 일하면서 글을 쓰고 싶다. 아니, 전업 작가가 되더라도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편의점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게이코의 18년 경력을 넘어서 20년, 30년 경력을 채우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정말 그 정도냐고? 편의점 일이 뭐 그리 좋으냐고? 여지껏 은은하게 편의점 자랑을 했지만, 아직 물음표가 사라지지 않는 분들을 위해 편의점과 나의 찰떡궁합을 조금 더 보여드리고 싶다.



다음 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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