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이 뒤틀리면서 아프다. 나는 일 년에 꼭 한두 번씩 체력이 바닥날 때면 심하게 체해서 하루종일 끙끙댄다. 이럴 때면 목부터 어깨까지 나무토막처럼 뻣뻣해진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렇게 아픈 게 오랜만인 것 같다. 남편이 요리를 하고 가정에 완전히 흡수된 이후로 늘 벌떡 깨있던 예민한 신경이 한층 누그러들고 마음의 여유가 찾아들었기 때문인 것 같다.
"띠링"
남편에게서 곧 도착한다는 문자가 왔다. 급한 일만 처리하고 온 다한 것치곤 시간이 꽤 걸렸다.
'그나저나 이브날에 아파서 어쩐다..'
언니네랑 같이 먹기로 한 저녁은 간단히 사 와서 먹자고 남편에게 일러두었다. 주말에 커다란 들통 세 개를 이틀 연달아 씻느라 지쳤고, 몸도 아프니 8인분 설거지와 쓰레기 처리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오늘 뭐 시켜 먹을까?"
이브날 메뉴가 걱정이라 말부터 던지며 돌아보니 세상 커다란 아이스박스를 들고 들어오는 남편이 보인다.
"이거 쪄 먹을 건데~"
어이구, 저 원수. 내가 아파서 끙끙대는 걸 보고 나가놓고는 결국 저걸 사 왔다고?
이쯤 해서 다른 집들은 특별한 날 식사메뉴 구성이 어떤지 참 궁금해진다. 크리스마스 같은 날에는 나가서 기분낼 수도 있겠지만 원하는 퀄리티의 음식점을 가려면 고공행진하는 물가로 인해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다. 집에서 분위기 낼 수 있는 다양한 메뉴들 중 우리 집엔 갑각류가 늘 등장한다. 이유인즉, 갑각류 킬러가 세 분 사시기 때문인데 대게, 홍게, 랍스터로 그들의 배를 채울 만큼 나가서 사 먹기란 주머니가 탈탈 털리는 일이다. 다행히 킹크랩은 향이 안 맞으시다고 패스하신다.
제철을 맞은 갑각류들과 맞아떨어지는 행사날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메뉴라 놀랍지도 않지만, 나는 지금 아프다고! 저걸 찜기에 찌고 먹고 나면 바로 쓰레기를 처리해야 되는데 나 정말 자신이 없다. 먹은 게 없고 물만 마셔도 꺽꺽대는 몸뚱이를 붙들고 서서 그가 개봉하는 아이스박스를 쳐다본다.
홍게 가득 개수대
"오늘 저녁은 홍게야."
홍게라면 보나 마나 주문진까지 가서 사 왔을 테다. 타이밍도 딱 좋아서 배에서 막 내리는 걸 사 왔다며 기뻐한다.
"애들까지 각자 1마리씩 먹고 홍게라면 해 먹자."
하아.. 그래 아픈 내가 잘못이지. 누가 아프라 그랬나. 맛있는 것도 못 먹고 말이다.
라면 육수를 이리 정성스럽게 내신다
무와 멸치맛국물팩, 파, 양파 그리고 홍게 한 마리를 넣어 벌써 라면 육수를 우려낸다. 학원 갔다 속속 등장하는 아이들꺼부터 쪄서 저녁을 차린다. 대게보다는 단맛이 더 있는 홍게라 역시 아이들이 좋아한다.
"와, 이모부 진짜 맛있는데요."
홍게 다리가 들어가 라면에 밥까지 말아먹고는 엄지 척을 해주는 조카다.
오늘 에피타이저는 방어
언니는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밤 9시가 다 되어 도착했다. 언니가 먹고 싶다고 했던 방어회로 먼저 시작한다. 피를 잘못 빼면 비린 맛이 나는데 역시 깨끗하게 잘 뺐다.
"엄마, 이거 너무 맛있는데? 심지어 색깔도 이뻐."
뒤이어 홍게가 차려지니 언니와 첫 조카가 다리를 하나하나 뜯으면서 좋아한다. 홍게살이 이쁜 색이라는 평가는 또 처음 받아본다. 사실 갑각류는 밖에 나가서 먹는 것 아니고는 누가 차려주지 않으면 집에서 이렇게 먹기가 힘든 음식이다. 나는 항상 남편이 손질을 다해서 주기에 당연하게 먹었는데, 얼마 만에 먹는지 모르겠다며 행복해하는 언니의 모습에 먹지 못하는 나도 배가 불러진다.
크리스마스 이브 식사
수율도 좋은 놈들로 잘 사 왔다며 뿌듯해하던 남편은 마지막 홍게라면을 끓여내 오신다.
"아, 어쩌지? 국물이 너무 달아졌어."
"채소육수에 홍게까지 들어가서 그런가 보다. 좀 맵게 해서 먹어."
칼칼한 국물로 마무리를 해야 먹은 것 같은 한국인이니 매움추가를 부탁한다.
"국물이 진짜 맛있어요. 뭐 넣었어요?"
후추와 페퍼로 치노를 더해 매운맛을 추가했다는 국물은 밥을 안 말아먹을 수 없는 맛이란다.
내장과 홍게라면이 말이 필요없다. 엄지척!
"엄마, 내가 오늘 아파서 치우지도 못하겠는데 남편이 홍게를 사 왔어. 지금 애들 거 차리고 언니 거 차리고 종일 서서 저러고 있어."
"00 이가? 참 대단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렇게 요리해 주는 남편이 어딨니?네 아빠는 라면도 못 끓이는데. 고맙다고 전해줘. 언니네까지 매번 그렇게 챙겨 먹이느라 고생이 많다고 말이야. 그 맘이 진짜 이뻐."
친정엄마랑 크리스마스이브 안부 통화 중에 툴툴대는 나에게 엄마는 남편의 깊은 속마음을 봐주신다. 내 돈을 들여서라도 맛있는 음식을 같이 나눠먹길 좋아하는 남편의 마음을.
"어머님, 안 올라오신 지 오래됐는데 한번 올라오세요."
딸들은 아무 말도 안 하는데 친청부모님의 방문을 남편이 챙긴다. 그 역시나 맛있는 음식 대접하고 싶은 마음인 것을 나는 안다.
본인이 즐겁고 기쁘게 하는 일을 격려하자. 하기 싫어하는 일을 마지못해 하게 만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