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깍지 > 1_#11_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너는 읽는다.
이슬람교도의 의식처럼 질리거나 불편한 기색도 없이
완벽히 매료된 몰입에서 우러나오는 너의 무표정.
언젠가 그대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야.
라고 베르나르가 조용히 말했다.
...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게 되겠지.
1. 츠네오는 대학 졸업반
심야 마작 게임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나는 단골손님들의 거드름 같은 간섭도, 격려인지 놀림인지 모를 지청구도 넉살 좋게 받아낸다.
자신만만한 열의에 넘치지도 않고 그렇다고 초탈한 우수에 빠지지도 않는 나는
이제 곧 쑥스러운 취업 준비에 들어가는 대학 졸업반.
학교 안에선 제법 어른이 된 것도 같지만, 곧 사회의 막내가 될 준비를 해야 하는,
그런 애매한 완성도의 성장을 평범하게 밟아나가는 중이다.
하여, 마음이 맞는 친구와 가볍게 섹스를 즐기기도 하지만
얼마 전 애인과 헤어졌다는 예쁜이 대학 동기의 접근에 설레기도 한다.
나의 애정 생활 또한, 애매한 완성도의 성장을 밟아나가고 있는 듯.
그런 애매함에 안주하는 나를 호통치듯 벼락처럼 돌진해 온 유모차
잔뜩 경계한 눈빛으로 칼을 휘두르는 소녀는 꾹꾹 늙은 할머니를 졸라 산책을 나온 참이란다.
할머니는 다리를 못 쓰는 손녀가 세상에 부끄럽고 죄송스럽기만 하여
새벽을 틈타서만 손녀에게 세상 구경을 시켜주곤 한다고 했다.
망가진 아이.
할머니는 손녀를 그렇게 불렀다.
그러나 그 망가진 아이는 무덤덤한 아침상에 생기를 불어넣는 사람이었다.
요리를 마친 후 싱크대 앞에서 쿵하고 떨어져 사람을 놀래키더니
무심히 몸을 이끌어 자기 자리를 찾아 차를 내리며 묘하게 사람을 집중시키는 소녀.
자취 생활에 찌들어 밥다운 밥이 그리웠던 내 감탄에 무표정하게 우쭐하는 모습도 귀엽기 그지없다.
그러니 내 모든 일상이 그 소녀를 만나기 위한 구실이 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
소녀가 보고 싶어하는 책, 집에서 보내준 식재료는 물론이고,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예쁜이 동기에게서 얻은 정보마저 너를 만나러 가는 구실이 된다.
불현듯 손에 닿은 감촉이 좋아 자꾸 물장구를 쳐보는 아이처럼 나는 그저 너를 만나러 갈 뿐이다.
아무런 긴장도 없이, 말하자면 아무 흑심도, 우습지만 목적도 없이,
너를 만난 나는, 즐겁다.
2. 조제는, 알고 있다.
이미 절판이 된, 그리하여 네가 헌책방을 뒤져 구해다 준 책을 읽는다.
그리고- 담담하게 빠져든다.
언젠가 그대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게 될 거야.
라고 베르나르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나도 언젠가는 그대를 사랑하지 않게 되겠지.
우리는 또 다시 고독하게 될 것이다.
그렇더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거기엔 또 다시 흘러가버린 1년이란 세월이 있을 뿐인 것이다.
'그래요, 알고 있어요'라고 조제가 말했다.
걷지 못하는 몸과 일생을 나눠온 체념의 대화가,
토닥토닥,
나도 모르게 날 다독인 것도 같다.
역시- 그렇구나.
이 무겁고도 슬픈 진실이 불편하지 않다.
끝없이 예쁜 환희가 사랑이었다면 오히려 혼란스러웠을 지도 모르지.
그래서 난 기꺼이 웃는다.
세상의 모든 외로움과 난 이미
친구가 되었으므로.
3. 호랑이같은 세상을 마주볼 용기
그래도, 사랑은 온다.
날 부끄러워하지 않는 어리석음을 품고, 그 어리석은 진심을 증명할 대담함과 성실함을 품고,
와서 내 나약함과 못남과 두려움까지 함께 품는다.
어디든 날 데려갈 것처럼. 어느 곳에서든 날 지켜줄 것처럼.
두근두근. 확신에 찬 박동으로 심장이 뛰듯이. 시간은 흐르고 계절은 변하겠지만,
사랑에 빠진 나는 그 어리석은 대담함과, 서툰 성실함과, 진실을 믿을 수밖에.
질끈 감은 눈을 간신히 뜨고서라도
내 나약함과 못남과 두려움 너머, 새로운 세상을 내딛어 볼 밖에.
네가 있으므로. 나를 사랑하는 네가 있으므로. 내가 사랑하는 네가 있으므로.
네가 있는 세상은, 네가 없던 세상과는 분명히 다른 세상이므로.
그곳에서는 호랑이 같던 세상의 날선 으르렁거림도 날 망가뜨릴 수 없음을 알겠다.
사실 난 이토록 당당히 세상을 활보할 수 있는 사랑임을 알겠다.
너에게 고맙다.
너는 나에게, 지금까지는 없던 세상을 살게 해주었으므로.
곧 지나치게 될 세상일지라도,
그래서 언젠가 다시는 못 돌아올 세상일지라도
지금 내 곁에
죽음만큼이나 완벽한 이 삶이
난, 기쁘다.
4. 그리고 물고기들
그러나 등에 업힌 것처럼 짓누르는 사랑의 무게는
어느덧 의심을 부른다
어리석은 각오가 아닐까-
난 이렇게 언제까지나 이 사랑을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결국 난 이것밖에, 안 되는 것인가
내가 어떻게
너에게 그럴 수 있을 것인가
모든 것은 변한다
마구마구
이 어여쁘고 안쓰러운 진실을 너와 나누고 싶지만
그래서 가벼이 웃고 싶지만
너는 굳은 표정으로
운전 중
너의 시야에 쏟아지듯 달려드는 앞은
풍경이 되지 못하고 흩어져 간다
미안
더 이상 우리를 스치는 그 모든 변화가 우리에게 풍경이 될 수 없음을
나 홀로, 쓸쓸히 깨닫고 말아서
이렇게 불현듯 너에게 알릴 틈도 없이
나는 혼자를 예감한다
세상에서 가장 야한 짓을해도 좋다는
여전히 황당하고도 정겨운 너의 허락을 열심히 수락한 끝에
바다 밑 깊은 곳으로 가라앉듯 어두워지는 의식의 변두리
담담히, 나를 향해 읊조리는 너의 독백이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간다.
그 멀어진 곳은 여느 때와 같이 내가 알 수 없는
깊고도 깊은 너의 고독
여느 때와 같이 너는 당황하지 않고
널 찾아든 깊은 고독을 마주보고 있었을까
처음으로 날 바다로 데려와 준 너의 등에 업혀
반짝이는 곳마다 너를 재촉하여
조개를 줍고, 또 주웠다
이 시간이 지나고
매끈한 표면을 빛내던 물기마저 마르고 나면
나는 다시 네가 없는 심연의 바닥을 홀로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
그러나 괜찮다
빛이 바랜 뒤에도
서걱서걱 말라버린 후에도
이렇게 너의 등에서 주워 올리던 기쁨을 기억하겠다
알고 있다
끝을 고백하는 일은
사랑을 고백하는 일보다
어쩌면 몇 배나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사랑에 빠진 확신과
그 확신이 낳은 온갖 용기로 무장한 자신을 고백하는 것과
더 이상 불태울 의지도
결의도 남지 않은 자신을 고백하는 일이
같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니 그대여
한때는 나를 사랑했던 이여
슬퍼 말기를
그대를 조르는 죄책감과 미안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음을
그대, 부디
가여워 말기를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겠지만
넌 이미 내게 평생을 지니고 갈 세상의 일부가 되어준 사람
나 역시 너에게 그런 사람이라면
우리는 결국 헤어졌지만
충분히 훌륭했어
그러니
미처 전하지 못했을 너의 걱정섞인 바람도
나는 이미 알아 듣겠다
한 조각의 생선을 정성스레 구워
꾸준히 나를 위한 밥상을 차려 내겠다
네가 없는 앞으로의 세상마저
당당히
살아가겠다
너의 웃는 얼굴을, 기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