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깍지> 1_#10_은교
빛을 잃고, 탄력도 잃고
탁하게 굳은 호박처럼 퇴색한 몸은
분명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하얗게 빛나며 푸른 숲을 달리던 젊음을, 그 흥분을
허나
어쩔 것인가. 벌거벗은 몸은,
축 늘어진 음경의 그늘에는, 추억은
있으되 폐허같은 흔적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다.
허나 또
어쩔 것인가. 폐허랄 것도 없이, 나는 그 폐허가
무덤덤하여 외롭지조차 않다.
그러니 소녀여.
너의 속셈없는 낮잠에 넋을 잃는 내가,
넋을 잃은 나를 뚫고 파고드는 네가,
나는 경이로울 수밖에.
유적처럼 굳은 땅에
씨앗이 뿌리를 지르듯
내 묵은 구석구석을 네가 오가고
뭉둑하게 다스려 온 삶의 연민이 달그락, 달그락
조바심치는데
마침 발견한 듯 너는 묻는다.
그게 시예요?
별이 모두 같은 별이 아닌 것처럼
너와 내 곁을 흘러지나는 이 시간도, 아마 각자의 흐름을 따라 길을 새길 것이나
나는 잃었던 길을 찾은 듯이, 우습게도 너의 길 위에서 우두커니
낯선 미소가 홀로 정겹다.
어쩌면, 네가 새겨준 헤나처럼
시간이 지나면 곧 지워질 길이라 해도, 불현듯 그 길에 도달한 이 찰나의 호흡이
내 탁한 살 아래의 오래된 기억을 부르는 것일 테지.
아니
어쩌면, 너의 길이 이미 아무 두려움도 계산도 없이
내 안에 뻗어 들어왔음일까.
무표정한 얼굴로 덕지덕지 쌓인 내 모든 과거가
차곡, 차곡,
네가 없는 외로움으로 색을 얻어갈 때
저리고 무거운 침묵은 문득
네가 그리웠는지 모른다.
뾰족한 연필이 슬픈,
내 마음의 먼 거리를 한 달음에 달려와 엄마의 발뒤꿈치를 슬퍼하던 너의 얼굴을
무뎌진 살의 죽음을 도려내는 삶의 잔혹함을 가여워하던 너를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싶었는지 모른다.
넋 놓고 너의 곁을 한 걸음
깊이 눌러 걷고 싶었는지도
무덤덤하게 굳어버린 나의 이 살들 깊은 안쪽에서 요동치는 기쁨을 다시,
좇고 싶었는지도 모르지
그게 날카롭게 벼려낸 눈물일지언정,
수액으로 솟아 새 가지로 뻗지 못한 채, 뭉둑한, 진물로 흘러내리느니
태연하게 환한 너의 길목에서 숲으로 흩어졌으면
낡은 마루처럼 삐그덕대는 걸음마다
갈망은 깊숙이
내 늙음의 딱딱한 뒤꿈치를 가로질러 간다.
네가 닦아 스며든 햇살이
벌거벗은 그늘의 틈마다 시리게 흘러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