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도 나름 재미있지

-내년에 보자 여름 옷 친구들

by 하누

좁다 좁아. 집은 좁아졌으나 사고 싶은 건 많다. 많지도 않은 월급이지만 일정 정도는 쇼핑에 써 줘야 개비스콘을 먹은 느낌이다. 원래 이렇진 않았다. 수입이 어느 정도 생기고 옷 입는 거에 재미를 붙이기 시작해서 그렇게 됐다. 군대에 관한 안 좋은 것들을 사소하게 나열 하지면 웬만한 석사 논문 이상으로 나올 것 같지만 장점이 있다면 정리하는 습관이 전보다 많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고 TV에 나오는 강박에 가깝게 정리하는 습관을 가진 건 아니다. 캔 방향이 일정해야 한다거나 전부 다 각이 잡혀있다거나 하는 등. 너무 깔끔해서 건드리기 싫을 정도는 아니라는 것. 그도 그런 것이 그래 봐야 내가 쓰는 공간이고 가족들이 왔다갔다 하지만 너무 지저분하지 않으면 되니까. 물론 독립을 하게 되면 지금보다는 더욱 철두철미하게 정리와 디자인을 할 것이다. 지금은 어차피 평생 있을 공간은 아니니 타협을 한 정도다. 집이 좁아서 청소는 쉽다만 쌓여가는 옷들은 어떻게든 분류하고 압축해야 했다. 이제 곧 가을이 다가오니 여름에 입었던 옷들은 슬슬 겨울잠을 재우러 보내는 중이다. 아직은 아우터 안의 옷은 얇은 옷이 필요하니 전부를 보낸 건 아니지만 이 녀석들도 곧 장롱 안에서 내년까지 잠을 잘 것이다.



정리는 주로 이렇게 시작한다. 스파 브랜드의 진열대를 꿈꾸며 바닥에 티셔츠를 차곡차곡 접는다. 최대한 각을 살리면 좋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어차피 내일 아침 뭐 입을지 고민하면서 이 옷 저 옷 꺼내다 보면 어질러지는 경우가 다반사기 때문이다. 그래도 여유가 있는 오늘 같은 때에는 최대한 예쁘게 정리하는 게 기분이 좋다. 사실 효율성이라는 거 하나만 놓고 보면 옷 정리는 거리가 먼 경우가 많다. 비싼 옷들도 아니고 대부분 '가성비'를 지향하는 무지 옷들의 특성상 꾸깃꾸깃하게 던져놓지만 않는다면야 상관없는 친구들이고 세탁기에 몇 번 돌아가면 택배박스에서 처음 봤던 빳빳한 탄력은 어디 갔냐는 듯 꾸깃꾸깃하게 노화가 와있다. (미안하다 면티야..) 다행히 작년에 구입했던 녀석들 중 오염이 심한 흰 티들 빼고는 올해까지는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차곡차곡 한 장씩 잘 개어서 포개 놓고 색깔도 잘 맞춰준다.


다음으로는 바지인데, 사실 내가 옷에 관심 있는 건 7할이 청바지다. 체형 특성상 슬랙스류 같은 얇고 찰랑거리는 재질의 바지는 입지 않는다. 빳빳하고 오염에도 강하며 막 다루어도 내구도에 손상이 가지 않는 데님이 내 대부분의 일상복이다. 게다가 생지 데님은 생활 습관에 따라 페이딩(워싱이라고도 하고 보통은 물 빠짐이라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변화하는 것이 특징)이 일어나서 나만의 워싱이 생긴 개성 있는 바지를 소장할 수 있다. 옷을 험하게 입는 편이라 이런 것에 강한 데님이야말로 나에게 가장 적합한 바지다. 애용하는 한 군데의 브랜드에서만 구입하는데 이 브랜드 바지를 사고 나서 소위 말하는 옷질(?)에 좀 더 적극적이게 됐다. 내구도가 강한 데님이라 사실 연청 중청 진청 블랙진만 하나 씩 있으면 몇 년은 입을 수 있다. 그러나 취미란 게 무엇인가 결국 한 두 번씩 입어도 '소장'에 의미가 있는 것들이다. 워싱에 따라, 핏에 따라 가짓수를 늘려가고 있다. "샤니 빵에서 띠부띠부씰을 모으던 아이가 커서는 청바지를 모아요!"가 되어 버린 거다. 그래서 이 친구들은 비슷한 계열끼리 잘 개어놓고 자리가 없어 옷걸이에도 걸어주는 특급 대우를 해주었다. 주인을 잘못 만나 작은 옷장에 빽빽이 있는 녀석들이지만 쉽게 버릴 일은 없으니 이해해줄 것이다.


아우터는 가죽재킷류나 데님, 항공점퍼, 블레이져 정도로 옷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다 알 법한 종류들이다. 무난함에 끝판왕이라고 봐도 좋을 것 같은데 그래서인지 거의 다 검은색이다. '가성비'를 지향하는 소비에 있어서 범용성을 포기할 수 없었다지만 지금 보면 죄다 검은색이라 조금 아쉬운 것 같기도 하다. 옷장 안에 제습제를 잘 넣어둔 덕인지 다행히 곰팡이가 피진 않았다. 자주 입는 옷들 위주로 걸어 놨는데 이 친구들도 공간이 없어 보이긴 한다. 못해도 2주에 한 번은 이런 식으로 옷장 정리를 하는 편인데 누군가에겐 정리가 귀찮고 스트레스 일 순 있지만 나에겐 꽤나 큰 성취를 주는 일이다. 다음 주 코디를 정하는 데에도 나름 도움이 되고 옷 관리 측면에서도 몇 번은 더 입게 해 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코로나로 인해 외출은 적어졌고 밖에 있는 시간도 적어졌지만 돈은 벌러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일요일을 실감하게 한다. 덕분에 집에서 보내는 주말의 휴식이 너무나 소중해졌다. 그동안 왜 글쓰기를 소홀히 했는지 후회가 될 정도다.

KakaoTalk_20200913_155416529.jpg 주로 입는 옷들이지만 다른 옷장 구석구석에도 옷이 많이 숨어 있다.


정리정돈은 소모적인 노동이지만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가져다 주기도 한다. 아마 겨울이 오면 또 한 번 정리를 할 것이고 겨울이 왔음을 실감하겠지. 한정된 공간 속에서 여유를 찾기란 옷이나 사람이나 쉽진 않음을 한 번 더 느낀다. 오늘도 독립을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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