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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Mar 31. 2024

99번의 환생.

20화. 표절.

통유리창으로 비춰 들어오는 석양을 바라보던 민혁은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 올린 뒤 스마트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네.  용산역 2번 출 35번 수화물 칸에 있는 물건을 봉투에 적힌 주소 우편함에 넣고 오시면 됩니다.

  비용은 계좌로 송금하죠.  "


통화가 끊긴 스마트폰을 귀에 댄 채 잠시 멈춰 있던 민혁은 귀찮은 무언가를 떨쳐내기라도 하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고는 의자에서 일어나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입고 사무실을 나섰다.  






"어머... 벌써 해가 지네요. "


서울로 돌아가는 길 밀리는 차량으로 온통 빨간 브레이크 등으로 가득 한 도로 위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수련이 낮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의 말에 앞을 바라보던 동방삭은 고개를 돌려 저무는 석양 대신 석양에 물든 수련의 옆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앞차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데도 움직이지 않는 동방삭 차량이 못마땅했던 뒤차가 경적을 울린 뒤에야 놀라서 자신을 쳐다보는 수련의 표정에 그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혼자서 운전하고 너무 무리하셔서 또 열나는 거 아닌가요.   지금 너무 빨간데........"


-"아... 아.... 아닙니다.  뒤에서 갑자기 경적을 울리니 순간 화가 나서 그랬지... 절대.. 아닙니다."


그녀의 입에서 '집착'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동방삭은 자신의 지난 모든 시간들이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그녀에게 들키는 순간 이제 더이상은 없다는 깨달음에 그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다잡은 동방삭은 화제를 돌리려고 애를 썼다.  



-"이렇게 밀릴 줄 알았다면 차라리 헬기를 탈 걸 그랬습니다."


"어머.... 그런 농담도 할 줄 아세요?  오늘 이렇게 애써주신 것만 해도 너무 감사해요."


-'농담이 아니고 진담인데.....'


-'그녀를 위한 일이라면 내가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이 있을까.  

그녀가 나를 받아들여만 준다면 또 하지 못할 일이 무엇일까.  

그동안은 그럴 기회조차 없었는걸.'


혹여 흔들리는 자신의 눈동자를 그녀가 볼세라 앞만 보는 동방삭의 옆모습을 주시하던 수련은 이내 다시 고개를 돌려 이제 저 산등성이 너머로 붉그스름한 여운 남기며 저무는 태양을 응시했다.  


밀려있는 차량들의 후미등의 붉은빛을 바라보는 동방삭의 눈에 수련공주의 윤기 나는 검은 머리를 묶고 있던 붉은 머리끈이 겹쳐 보였다.  그녀를 떠올린 순간 그는 심장이 쪼개질 것 같은 아픔에 숨을 훅하고 내뱉었다.  

창백해진 그의 안색에 놀란 수련이 옆에서 물을 건네어주었고 물을 한 모금 마신 뒤에야 그는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놀라셨죠.  이제 괜찮아요."


자신을 걱정하는 수련의 표정을 보며 동방삭은 마음이 착잡해졌다.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그녀에게

그 모든 것을 기억하는 자신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또 어떤 것이 좋은 방법일지 그 오랜 시간을 살아온 자신이지만 정말 그것에 대해서는 갈수록 알 수도 없고 또 갈수록 자신도 없었다.  이제 더 이상은 기회가 없기에 그녀와의 시간은 너무나 소중했지만 언제나 매번 그로부터 그녀를 빼앗아가는 연계을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지금 대한민국에 있는 수련의 직전 환생에서도 고려의 수련공주는 자신의 사냥터에서 넘어져 무릎에서 피를 흘리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말에서 내려 붉은 머리끈을 풀어 상처를 감싸줬었다.   원나라의 사절단 신분이었던

그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고려왕에게 압박을 가했지만 고려후기 왕권을 흔들었던 무신정권의 난을 평정한 최장군(연계휼의 환생)은 왕권을 볼모로 수련공주를 그로부터 빼앗아갔다.   사냥터에서 수련공주를 만난

뒤 원나라 사절단을 위한 궁궐 내 행사가 있을 때마다 공주에게 다가가려 애쓰며 원나라 황실에 긴밀히 연락을 해왔던 그였지만 그 모든 것들이 수포가 되고 말았다.  


이미 정혼자가 있었지만 가문끼리의 정혼을 무리하게 파기하면서까지 공주와의 혼인을 감내한  최장군이었건만 혼례행렬의 맨 앞에서 말을 탄 그의 눈빛은 서늘했다.

언덕 위에 숨어서 주먹에 쥔 붉은 머리끈을 주먹이 새하얗게 핏기가 가실 정도로 힘을 쥐고 있던 동방삭은 최장군의 눈빛에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아! 저것은 사랑이 아니다.  내가 만든 죄업의 굴레 때문에

그녀도 고통받고 있구나.'


전생을 거듭해도 매번 또다시 연계휼과 맺어지고야 마는 그녀. 그리고 차마 지켜볼 수 없을 정도였던 그녀의 이후 생활들...... 그 모습들이 겹쳐 보여서 언덕 위에 숨어 있던 동방삭은 그 자리를 도망치듯 뒤걸음 질로 빠져나와야 했다.


  '하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동방삭이 상념을 애써 떨치며 마음을 다시 다잡는 그 순간 수련의 스마트폰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 동방삭의 얼굴을 살핀 수련이 '편집장님'이라고 표시된 전화를 받았다.



"네.. 편집장님.. 저요?  아.. 네... 자료 조사차 밖에 나갔다 들어가는 길이에요.

  아... 지금요? "



전화를 받던 수련이 스마트폰을 귀에 댄 상태로 동방삭을 쳐다보고는 이내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급한 일이세요?

.........예?  표절요?  "

이전 19화 99번의 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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