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 산업혁명, 생존전략 이야기 : 닌텐도 편 (4)
대한민국의 기업은 원래 성장, 혁신주의 성향이 강했다. 제면기로 국수를 만들어 팔던 회사는 삼성그룹이 되었고, 작은 자동차 공업소는 중공업을 아우르는 현대그룹이 되었다. 비록 패스트팔로워지만 워낙 빠른 경제발전속에서 끊임없이 치고나아가야 했으며, 이를 서로 쫒아가는 과정에서 시장이 형성되었다.
하지만 IMF이후, 큰 타격을 받은 기업들은 대규모 투자를 중단하고 기존의 사업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는 체제로 변환했다. 이후 제품의 단가를 조정하고, 기존 사업을 보완하는 경영이 도입되었다. 물론 그렇게라도 성장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은 모양이다.
2015년 연합뉴스는 30대 그룹 순이익 95%가 5대 그룹에서 나온다는 기사를 낸다. 한국일보는 재무문재를 겪는 대기업이 늘어난다고 말하고 있다. 기존 사업분야에서 정체를 겪는 것이다.
이런상황을 나타낸 말을 장하성 대통령비서실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회 위원장은 기존의 인터뷰, 강연에서 뽑아서 인용하자면
한국기업의 성장이 정체되었고 더 이상 나아갈 길은 없는데
뒤에서는 중국, 인도가 쫓아오는 위기
한국 기업이 딱히 느리게 뛴 것은 아닐텐데 상황은 희안하게 돌아가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이 이뤄진다고 하더니 어느새 선진국은 물론 중국, 대만기업이 ICT의 선두에 서 있으며 대만 NVIDIA는 AI부문의 선두주자에 올라서있다. 차세대 친환경차 시장에선 뜬금없이 중국의 BYD가 Top에 올라가있다.
보통 이런 위기에 몰리면 할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서 그곳에서 독보적인 존재가 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자신이 가진 분야에서 극한의 1위가 되는 것이다. 꼭 1위여야 하냐고? 물론 1위는 힘들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각오로 안하면 일정 수준이 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보통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는데 시행착오를 겪는다. 이는 잘 나가던 닌텐도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카드 산업 1위에 이르렀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고 사람들과의 교류를 거치면서 비디오 게임이라는 본업을 찾아냈다.
닌텐도의 역사는 무려 130여년에 달한다. 저자가 임의대로 나누면 1세대인 카드 기업, 2세대인 완구 기업 그리고 우리가 아는 3세대인 게임기업으로 나뉜다. 얼핏 보면 성격이 달라 보인다. 하지만 엄밀히 분석해보면 이 3가지 형태에도 유사점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들은 놀이라는 가치를 추구하고 있다. 닌텐도의 전략, 실패요인을 분석하거나, 의도를 파악할 때 ‘놀이’에 키워드를 맞추면 의외로 답이 쉽게 나오는 경우조차 있다.
이 과정에 주목하시길 바란다. 닌텐도의 오늘날의 비즈니스는 물론
경영의 기본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닌텐도의 첫 사업은 화투였다. 비디오 게임과는 엄청난 거리가 있기에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할수도 있지만 의외로 이때의 여러 노하우는 게임회사 닌텐도는 물론,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지니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 정확히 말하면 화투도 하나후다(花札), 고도리(五鳥), 카루타(カルタ)등으로 세분화되지만, 이 책에서는 편의상 화투로 통일하여 표기한다.
1889년 9월 23일, 야마우치 후사지로(山内房治郎: 1859~1940)는 화투를 제조, 판매하는 상점인 ‘닌텐도 곳파이(任天堂骨牌)’를 창업한다. 이게 첫 창업은 아니고 원래는 석탄판매상, 하이코 혼덴(灰孝本店)의 후계자였다. 뜬금없는 창업 이유는 어찌보면 단순했다. 메이지 정부가 화투 규제를 풀어버린 것이다.
당시 일본에서 최초의 근대식 의회가 성립되었고 한국에서도 유명한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었다. 정부는 갑작스럽게 바뀐 정부에 민심이 쏠리지 않았다고 판단, 우호적인 인상을 주기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실시했다. 이때 화투규제도 풀렸고, 이 틈새시장을 후사지로가 치고 들어온 것이다.
야마우치 후사지로는 단순히 상업에만 재능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직접 화투의 그림을 그렸고, 화투를 제작하는 기술자이기도 했다. 그가 만든 화투는 여러모로 잘 팔렸다. 지금의 화투는 공장에서 찍어내는 플라스틱판이지만 당시 화투는 대량생산품목이 아니라 수공업품이었다. 비교하자면 압착된 복사용지뭉치를 이해하면 좋겠다.
여러장의 종이를 압착해서누르고 그림을 그린 화투, 사업 초기에는 교토 인근지역에서만 판매하지만 이후 영역이 점점 넓어진다. 후사지로는 화투를 팔기 위해 ‘닌탠도배’ 화투 대회를 개최, 교토에서 큰 인기몰이를 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고객은 도박꾼이었다.
요즘같이 플라스틱으로 만든 화투도 손톱으로 망가뜨려서 표시할 수 있는 마당에 수공업으로 만든 화투는 한번 치면 종이가 손상되기 일수였다. 돈이 오가는 중요한 도박에 표시가 생긴 화투를 쓸 수는 없는 법, 매번 새 화투를 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밀려드는 주문에 몸이 남아나지 않던 후사지로는 제자들을 고용해서 도제시스템을 구축한다. 여러 사람이 화투그림을 그리기 시작한것이다.
이후 후사지로는 1902년 트럼프 사업도 시작한다. 후사지로가 화투사업을 시작한 것도 어이없지만 이쪽도 만만치 않다. 1900년대 초, 일본정부는 화투에 골패세(骨牌税)라는 것을 부과한다. 일본은 부동항을 찾아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일동맹(1902)를 맺었는데 이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고, 이를 세금으로 충당하려고 한 것이다. 덕분에 중소 화투제조업체는 연이어 도산, 폐업한다.
하지만 닌텐도는 이미 시장에서 자리잡고 기반을 구축해놨기 때문에 오히려 경쟁자가 사라져버리는 어부지리를얻었다. 그러나 골패세는 닌텐도에게도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트럼프에 손을 댄다. 트럼프는 메이지 정부가 건드리기 부담이 되는 항목이었다. 서양인 선교사, 외국의 기자, 사업가 들이 주로 가지고 노는 것이 트럼프인데 여기 세금을 물렸다가는 까딱하면 동맹국까지 건드리는 일이 될 수 있는것이었다.
이렇게 후사지로는 빈틈을 잘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능력은 참으로 재미있게도 훗날 닌텐도의 경쟁력에 그대로 이어졌다.
손으로 그렸다고 우습게 볼 수도 있겠지만 닌텐도의 화투는 상당한 고품질이었다. 데이빗 쉐프의 ‘게임 오버, 닌텐도 제국을 만든 남자들(1993)’에는 닌텐도가 화투를 만드는 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후사지로는 전통적인 방법에 따라 삼지닥 나무 껍질을 사용했다. 이 껍질을 두들겨서 편후, 점토를 섞어서 건조시킨 후 이를 여러장 겹쳐서 성형한다. 여기에 자기가 고안한 나무인쇄기를 눌러서 카드의 윤곽을 만든다. 그 다음에는 스텐실을 이용, 그림을 그려나간다. 배경은 빨강, 풀은 검정, 달은 색칠하지 않았다.
후사지로는 처음에는 손으로 그렸지만 이내 이런 방법으로 방식을 바꾸고 제자들을 고용, 양산체제에 들어간다. 얼핏보면 굉장히 비싸고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시대가 100년전임을 생각해보라.
오히려 감탄사가 나오는 것은 인쇄였다. 후사지로는 다른 화투업체와는 달리 색을 줄이고, 그림에 공을 들였다. 이는 그가 뛰어난 공예가였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는데 왜 그림에 공을 들이면서 색은 줄였을까?
원가를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후 닌텐도의 제품이 굳이 마땅한 기술이 있어도 원가구조에 악영향을 미치면 과감히 빼버리는 것을 감안하면, 심지어 2017년에 나온 닌텐도스위치조차 검증되긴했지만 구형인 테그라1의 커스텀 칩을 사용한 걸 보면 그 발상은 여기서 나온 것인듯 하다.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이 공법으로 인건비를 줄인다. 당시 카루타는 메구리카루타(捲りカルタ: 한국인에게 익숙한 화투)와 가부카루타(かぶカルタ: 숫자를 맞추는 카루타) 두 종류가 생산되었고 이 둘은 미묘하게 그림이 달랐다.
다른 업체는 일일히 이것을 따로 생산했는데 닌텐도가 스텐실로 그림을 인쇄한다면 작업이 훨신 간편해진다. 기본 제품만 생산해놓고 시장에서 부족한 제품만 따로 찍으면 된다. 결국 공정이 간단해지고 일손이 크게 줄어든다.
훗날 3대 사장인 야마우치 히로시 사장은, 닌텐도가 잘나가는 이유는 세계 최고의 소프트웨어메이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약간 다르다.
저자는 닌텐도의 소프트웨어의 품질은 아주 높게 평가하지만 닌텐도가 잘나간 이유는 ‘유통’에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유통망을 확보, 관리하는 능력이 뛰어났기에 독재체제가 이뤄질 수 있었고,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는 닌텐도의 압력에서 자유로운 독자적인 유통체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닌텐도는 유통을 제어하는 자가 이긴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를 처음 배운 것은 언제인가?
후사지로는 단순히 좋은 제품을 싸게 잘만드는 것만이 아니었다. 유통능력도 뛰어났다. 점점 성장하는 닌텐도, 문제는 전국규모의 유통을 감당할 재주가 없었다는 것이다. 요즘도 전국규모 유통망을 만드는게 쉽지 않은데 19세기는 오죽했으랴.
하지만 닌텐도는 한때 일본 트럼프 1위의 회사였다. 전국규모의 유통망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인데 이 계기는 고향친구이자 일본의 담배왕이라 불리던 사업가인 무라이 형제상회(村井兄弟商会)의 무라이 키치베(村井吉兵衛)가 만들어줬다. 야마우치는 무라이의 담배판매망에 트럼프를 판 것이다.
담배판매망은 여러가지 이점이 있었다. 우선 도박장에서 스트레스를 이겨내기 위해 담배를 많이 피웠던 것이다. 판이 커질 때 새 카드를 사기 위해 가게에 갈 경우가 있는데 만약 담배도 같이 사야 한다면 둘 다 파는 가게에 갈 확률이 더 크지 않겠는가? 언뜻보면 후사지로만 이익을 얻고 키치베는 손해만 볼 것 같지만 내막을 따져서 생각해보면 둘 다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거래였다.
어떤 사업이든 양측의 이익이 생겨야 이뤄진다
여기서 후사지로는 한술 더 떴다. 담배와 트럼프의 크기가 같다는데 착안점을 둔 것이다. 기존의 담배진열대에 카드를 진열해도 아무런 위화감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닌텐도의 제품이 돋보이긴 어려웠다. 그래서 후사지로는 ‘시가렛 카드(Cigaret Card)’ 마케팅을 도입한다.
당시 담배판매는 국가의 기간산업이 아니라 완전히 민간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제품규격에 규제가 없었다. 제품의 판촉도 자유로웠기에 가능한 전략이었다.
담배 한갑에 한 장의 시가렛 카드, 사람들은 이를 모으기 위해 열심히 담배를 샀다. 이를 모아 하나의 트럼프, 화투를 만들수도 있었다. 사진에서 보시다시피 그림에는 화투 그림도 트럼프 그림도 있었기 때문에 모으는 방식에 따라서 화투도 트럼프로 만들 수 있었다.
정말 훌륭한 Win-Win전략이었다. 닌텐도는 유통망을 얻고, 무라이 상회는 시크릿 카드라는 상품을 바탕으로 매상을 더 올릴 수 있었다. 훗날 이 시가렛 카드가 엄청난 값어치를 지닌 미술품 대접을 받는 것은 여담이리라.
이런 방침은 훗날의 닌텐도의 전략에 그대로 옮겨간다. 원가를 최대한 낮춰서 만들고, 유통망을 장악한 다음 고객에 눈을 끄는 진열을 하는 것은 이때부터 생긴 전략이며 이후 닌텐도의 완구는 물론 비디오게임 사업에까지 계승된다. 그 유명한 닌텐도 초심회의 원형이다.
이후 1904년,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정부는 담배판매를 국가가 관리하게 되고, 점점 규제를 늘려나간다. 후사지로는 발빠르게 사업의 주체인 일본 담배 소금 공사와 독점계약을 맺는다. 담배 소금 공사가 소유한 담배가게에서 닌텐도의 제품을 판매한다. 국가가 알아서 관리해주는 상권에 자리잡은 셈이었다.
저자는 잘 나가는 기업문화를 보고 베끼는 것을 좋게 보지 않고, 오히려 경계한다. 오히려 기업이 망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포드 자동차는 미국내 자동차 회사 중에서도 친 직원적인 문화를 자랑한다. 그런데 이는 직원을 위해서라기 보다는 포드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직원이 돈이 있어야 포드의 차를 살테고, 주5일제를 실시해서 여가가 있어야 차를 사서 놀러갈 욕구가 생기기 때문이다. 반면 모 회사는 남의 자동차 판매망을 빼돌리는 것으로 시작한 회사였다. 지금도 비슷한 형태로 커오고 있다.
그렇게 오랫동안 지내면서 뿌리깊게 비즈니스 모델이 완성되었는데 어설프게 바꾸면 경쟁력만 잃고 직원들은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기업이 경쟁력을 확실하게 만들고 싶다면 뿌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기업의 문화는 뿌리에서 만들어진다.
닌텐도의 경쟁력은 유통장악, 원가절감, 콘텐츠에서 나온다
이는 1889년부터 만들어진 닌텐도의 비즈니스 철학이며, 업종이 다른 게임회사 닌텐도도 계승한다
이메일 : inswrite@gmail.com로 업무/기고 의뢰 주시면 성심성의껏 답변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