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어버려야 할 시간에 대하여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내게 남긴 것

by 조승희

나는 기억을 상실했다. 강제로 제거당했다. 내게는 폐쇄한다는 통보조차 없었다. 자진 폐기했던 짝사랑의 기록, 하루도 빠짐없이 썼던 일기들, 원본 파일조차 사라져 버린 사진들, 차곡차곡 모아 오던 여행의 흔적들까지. 한 순간에 사라졌다. 일시적일 것이라 생각했던 싸이월드의 접속 제한은 지금도 여전하다.


나는 혼자서 하는 여행을 즐긴 덕에 사진을 많이 찍었다. 내 모습이 담기지 않은 풍경 사진들이 대부분이었다. 여행기를 공들여 썼다. 같이 추억을 되새길 사람이 없는 여행의 추억들은 오롯이 한 번씩 들춰보던 사진 몇 장과 문장들로 남겨져 있었다. 무엇을 보았고, 먹었고, 누구를 만났고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하는 일상의 기록은 사소했기에 다시 볼 때마다 낯설어지곤 했다. 한 번씩 들춰보지 않았더라면 사라져 버릴 과거들이었을 것이다. 기억되고 있다 생각할 땐 대수롭지 않았다가 잃고 나니 이 일을 어쩌나 싶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이렇게도 매력적인 문장으로 시작되었다. 기억을 잃은 남자, 기 롤랑은 일하던 탐정사무소가 문을 닫자 자신의 과거를 추적해보기로 결심한다. 단 하나의 단서에서 시작된 기억 찾기의 여정은 미로 속의 길을 찾듯 몽환적이면서 집요하다.


은퇴 후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 롤랑의 친구가 “나는 그것이 정말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의심스럽군요.”하고 나의 의문을 대변해주었다. 현재를 살아야 할 인간에게 과거란 적당히 잘 묻어두고 살아야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말 내가 기 롤랑이라면? 기억 상실자가 된다면? 사랑했던 사람들과 살아온 흔적들을 기억할 수 없게 된다면?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한낱 웹페이지에 저장된 흔적의 파기에도 호들갑을 떨었던 나였다.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던 존재들, 대자연 앞에 서서 ‘이렇게 살아있어 감사합니다.’ 하고 외치던 숭고한 순간들,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더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할 것 같아 가슴이 터질 것 같던 벅참. 그런 것들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내가 지금껏 잘 살아왔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살아오며 마주친 타자들을 통해 완성되어 가는 나와 대상에 대한 애착, 그것이 바로 정체성이지 않은가.


그러나 누구나 행복한 인생의 순간만을 간직하며 내가 되진 않는다. 전쟁과 가난, 가정폭력과 병고, 배신과 불화 등으로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내가 저 흔한 일일 연속극, 운명에 놀림당하는 불행한 여주인공이라면 기억을 잃고 새롭게 시작할 기회를 과연 마다할까.


나는 수업 시간에 필기 대신 편지 쓰기로 항상 손이 바쁜 아이였다. 열심히 써 보낸 만큼 늘어나는 편지들을 내 보물이라 여겼다. 그러나 새로운 추억과 끝나버린 인연들의 흔적들을 모두 보관하기엔 나의 과자 상자는 너무 작았다. 이사를 갈 때마다 편지 상자들을 적절히 분류하여 폐기 처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망설이다 끝내 버리지 못하고 한 자리를 차지했던 것들이 다음번에는 일 순위로 정리되었다.


기 롤랑 역시 만나는 사람들의 과자 상자 속 편지나 사진 한 모퉁이에서 자신을 발견했다. 그 단서들을 쫓아 자신과 관계를 맺었을 사람들을 추적해 나간다. 우리 존재의 흔적이란 거리낌 없이 주고 말아도 그만인 타인들 편지나 사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모래는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 밖에 간직하지 않는다.’

‘우리의 삶 또한 더 단지 더 놀고 싶어 울고 있는 어린아이의 슬픔과 마찬가지로 저녁 속으로 빨리 지워져 버리는 것이다.’는 작가 모디아노의 말은 쓸쓸하지만 아름답다.


하나하나씩 모아지는 퍼즐 조각들, 그러나 자신에게 남아 있는 흐릿한 감정과 타인이 기억하는 나는 어렴풋이 어긋나 있어 그것들이 진실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기 롤랑은 마지막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찾아가 보리라 다짐하며 소설은 미완성의 퍼즐처럼 막을 내린다. 맞추어 나가려는 시도들의 연속일 뿐 끝나지 않을 여정이다.


전에 써 두었던 글들을 다시 꺼내어 고쳐보려 노력 중이었다. 싸이월드의 여행기가 떠오른 것도 그런 욕심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옛날에 썼던 것이 아까워 재생시켜보려 할수록 글은 점점 꼬였다. 잘 지어진 문장이지 지금의 진실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 잃어 다행이다. 다 비워야 다시 담을 테니. 모래는 새로운 발자국으로 채워지고 눈물을 그쳐야 편안한 밤을 맞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에 모든 것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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