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침이 가고 밤이 갑니다.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를 읽고

by 조승희

오늘 아침도 작은 전쟁을 치르며 여섯 살 꼬마를 등원시키고 왔습니다. 아침밥도 의무감으로 뭐든 한 숟갈 떠먹여 보내야 엄마로서 도리를 다 한 듯하고, 기분 좋게 보내려 비위도 맞춰주고 합니다. 차 안에서 끝까지 손을 흔들며 뽀뽀를 날리던 딸을 태운 차가 저어기로 사라지고 나면 그리움이 해방감과 함께 밀려옵니다.


일하는 엄마라 함께 많이 못 있어 주는 것이 내심 미안하여 주말엔 열심히 놀아줘야지 다짐하는데 막상 그날이 되면 조금 놀아주고 지쳐버립니다. 나도 내 휴일의 자유를 누리고 싶은데... 어서 자 주면 좋겠다, 하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같이 논다고 생각하면 된다던데 처음엔 그런 마음으로 시작해도 끝은 겨우 놀아줬구나 하고 마무리되지요.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을 것 같으면서도 그래도 내 삶을 다 내어줄 정도는 아닌 것인가 하는 그런 이중적 생각이 들면서 반성과 합리화를 거듭 반복하게 되지요.

부모가 된 후 더 깊게 감정 이입하게 되는 게 아이와 관련된 영화나 이야기입니다. 평소 주인공이 울면 무조건반사적으로 울보가 되고 마는 저는 '다섯째 아이'를 읽고 '캐빈에 대해서'를 볼 때는 하루 종일 끙끙 앓을 정도였습니다.


다섯째 아이는 2007년 노벨상을 수상한 도리스 레싱의 작품인데 200페이지 정도의 중편소설입니다. 길지 않은 데다 몰입감까지 있어 한 번 손에 들면 쉬어 읽기가 어려울 정도로 재미가 있습니다. 이상적인 가족을 꾸리고 싶은 해리엇과 데이비드 부부는 능력이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큰 저택을 구입, 아이들을 낳기 시작합니다. 친척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며 매년 행복한 가정임을 뽐내지요. 일 년마다 한 번씩 낳게 되는 아이들의 양육은 늙어가는 해리엇의 엄마가, 경제적 부담은 데이비드의 아빠가 담당하지요. 다른 가족들의 희생을 통한 행복이었지만 다섯째 아이를 갖기 전까지는 그런 문제점들은 참을만한 정도였지요. 이제는 가족 모두가 한계라고 생각했을 때, 해리엇은 자신은 물론 모두가 원하지 않는 다섯째 아이 벤을 임신하게 됩니다.


이런 가족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을까요? 헤리엇이 불안하고 힘든 임신기간을 거치고 낳은 벤은 보통 아이들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생김새도 특이했고 힘도 굉장히 셉니다. 개나 고양이를 죽이고 형의 팔을 비틀어 부러트리고는 웃습니다. 이 정도면 평범하지 않다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지요. 가족들은 두려움을 느끼고 벤을 멀리하게 되고 데이비드는 그런 벤을 요양소로 보내버리고 맙니다. 병원에서는 정상이라는 이 아이, 차라리 문제가 있다고 진단 내려주었다면 해리엇는 면제부를 받고 자식을 버렸다는 죄책감을 덜 수 있었을까요? 결국 해리엇은 사회적으로 강요된 모성과 죄책감에 벤을 요양소에서 집으로 다시 데려옵니다.


남편과 다른 네 명의 자식의 행복에 반하면서까지 선택한 벤의 양육은 쉽지 않습니다. 마음속으로는 벤의 삶이 나의 의도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에 의해 끝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모성도 절박한 자기애를 이길 수 없는 것일까요? 이런 해리엇을 비날 할 수 있을까요? 분명 인간은 도덕과 사회적 양심이라는 것에 맞춰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의 도덕에 반하므로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어 마음속에 묻어둔 이기적인 본성을 도리스 레싱이 표면화시킨다는 점에서 굉장히 위로받는 느낌이었습니다. 강요된 모성에 부합하려 형식적으로 자식을 양육하는 것은 아이를 변화시키지도 자신을 행복하게 하지도 못했습니다. 결국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말지요.


약한 새끼는 죽여버리는 것이 당연한 동물 세계가 아닌 인간 사회 속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해리엇과 벤, 그 가족들이 다 같이 행복할 수 있는 접점은 과연 어디일까요? 가족들이 아이의 다름을 인정하고 구성원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해 어느 정도의 시스템과 사회적 공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비정상적인 아이가 태어나면 어쩌나 불안한 마음, 엄마라면 많이들 겪어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조금 다른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것에 대해 따뜻한 시선과 부모의 사후에도 그 아이를 잘 보살필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다면 마음 편하게 임신 그리고 육아 기간을 보낼 수 있을 거란 생각도 드네요. 하지만 이것조차도 벤의 입장에서 생각한 결론은 아닙니다.

'캐빈에 대하여'는 자유로운 여행가였던 에바가 원하지 않는 아이, 흔히 사이코패스라 하면 설명이 쉬울 것 같은 아이, 캐빈을 낳고 기르는 이야기입니다. 캐빈은 엄마와 불화하고 결국 가족들과 학교 친구들을 무작위로 죽인 후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에바는 모든 것을 잃고 가해자의 엄마로 힘겨운 생활을 하며 과거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과거와 현재가 엇갈리며 불친절하게 전개되지만 그렇기에 더 초집중하며 본 영화입니다.


두 작품 모두 제목이 해리엇과 에바가 아니고 '다섯째 아이'와 '캐빈에 대해서' 임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 역시 다섯째 아이와 마찬가지로 엄마의 입장에서 보게 됩니다. 엄마의 노력에도 엇나가는 캐빈에게 증오심이, 일과 자유를 다 포기하고 아이와 잘 지내보려는 에바에게는 동정심이, 나 스스로에게는 '우리 아이가 저렇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이야.' 하는 안도감이 동시에 듭니다. 아이를 온전히 사랑으로 키운다는 것은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정도로 숭고한 일, 평생을 다 바쳐야 하는 일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명감이나 의무감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라면 부모의 자격은 너무나 무거운 것 아닐까요? 과연 온전한 부모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요? 누가 에바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요?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합리화를 하기 위하여 저는 헤리엇과 에바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존재를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버린 벤과 캐빈의 입장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캐빈이 엄마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알고서 캐빈이 그 일을 저질렀구나 하는 생각이 든 후로는 다시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책 원제가" 우리는 캐빈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인데요, 캐빈의 마음과 이야기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잠이 든 딸을 두고 조심히 문을 닫고 나와 책상 앞에 앉습니다. 얼른 재우고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던 엄마의 마음을 알고 혹시나 섭섭하진 않았을까 새삼 걱정스럽고 미안한 생각도 듭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원점으로 돌아옵니다. 의무와 사랑, 애증의 가족관계, 우리 사는 것이 단답형 문제처럼 단순하지 않나 봅니다. 오늘도 아침이 가고 밤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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