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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트온 Nov 16. 2020

나에게, 커피

재료공학도는 어떤 재료도 가지고 놀 수 있다

저는 6학년 때부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어른들이 마시던 커피 - 지금 생각하면 2.2.2. 다방 커피 레시피 - 냄새가 너무나 좋았기 때문에 엄마를 졸랐고, 엄마는 카페인 섭취를 조심해야 하는 제 나이를 감안해  1/2.2.2로 조정해서 커피를 만들어 주셨어요. 어른들 전용이던 예쁘게 잘 빠진 커피잔 손잡이에 손가락을 걸고 커피를 홀짝거리며, 입안에 달콤하게 퍼지는 '어른' 느낌을 상당히 즐겼어요. 


이미 그렇게 커피에 입문했던 전적이 있던지라, 청소년기에 들어서 어느 날 눈 앞에 나타난 커피 자판기에 동전을 넣어 친구들과 이런저런 커피를 뽑아 마셔보는 호기심 풀이 실험 정도는 쉽사리 감행했고, 고등학교 때부터는 졸음 방지차 아침 일찍 등교하자마자 한 잔 자판기 커피를 뽑아 먹는 일은 일상이 되었습니다. 


한동안은 그렇게 제 입맛은 자판기 다방 커피에 머물러 있었어요. 


미국에 와서 제가 그 자판기 커피를 그토록 그리워하게 될 줄...!



'익숙한 것을 함부로 떠나 고통받았던 것 리스트' 안에 '자판기 커피'도 당당히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학교, 회사, 연구소, 미장원, 만화방, 길거리 어디서나 언제나 뽑아마실 수 있었던 자판기 다방 커피가 미국엔 없더란 말입니다. 미국에 오래 살면 늘어 가는 것은 혼자서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편리하게 사 먹을 수 없으면, 해 먹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전에 엔지니어링 회사 연구소에서 일할 때, 앤소니라는 동료가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저보다 몇 살 많은 싱글 남자였는데, 주말에 여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고 오면, 자신이 어떤 요리를 해줬고, 여자 친구와 무엇을 했는지 시시콜콜 들려주곤 했어요. 한 번은 제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넌 좋겠다. 요리를 잘해서. 난 요리 잼병이야.'라는 말을 했는데,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수긍할 수 없다는 듯 반문했어요. 


재료 공학하는 사람들은 요리를 못할 수 없어. 음식도 하나의 재료일 뿐인 걸!


그 말을 듣고 저는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재료 공학을 전공한 것을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자랑스러워해 본 적이 없었던 것 같아요. 무슨 재료가 주어져도 다 요리하고 다룰 수 있다는 자부심! 그게 재료 공학도의 자부심이라는 걸 제가 그때 앤소니에게서 배웠습니다. 


제가 너무나 '이것도 못한다', '저것도 못한다'라는 생각으로 저 자신을 묶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후로 저는 '나는 그런 거 잘 못해.', '그런 거 잘 몰라.'라는 생각을 제 머릿속에서 걷어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들을 걷어 낸 자리에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었어요.


지금까지 관심이 없고 필요가 없어서 손대지 않은 영역은 있어도. 내가 관심을 가지는 분야, 내가 하고 싶고, 해야 하는 건 뭐든 해낼 수 있어! 

이후로 저는 '부엌 트라우마' - 나에게, 밥짓기 참조- 를 극복하고, 부엌을 실험실로 여기기 시작합니다. 식재료는 저의 엔지니어링 재료이고, 조리 도구들은 저의 실험 장비가 되었습니다. 


커피도 그렇게 제 실험대 위로 올라오게 된 식재료 중 하나였습니다. 


이왕 실험을 시작하는 김에, 저는 인스턴트가 아닌 원두를 사용하기로 합니다. 인스턴트 다방 커피 맛을 잊고 원두커피에 맛을 들이도록 만든 일등 공신은 자판기 대신 미국 거리 곳곳에서 찾을 수 있는 '별다방'이었습니다. 저는 시애틀에서 처음 미국 생활을 시작했었고, 시애틀에선 정말 '별다방'과 같은 커피전문점이 도시 전체에 한 집 건너 하나씩 널려있는 느낌이었습니다. 여름 석 달을 제외하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을씨년스러운 아침 공기가 뼛속을 파고드는 시애틀에선, 아침 출근길에 버스를 타면, 모두가 손에 뜨거운 커피를 들고 홀짝거리며 한기에 떠는 영혼을 달래는 도시인만큼 너도나도 커피점을 여는 이유가 충분합니다.


저는 커피를 만드는 절차를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3단계로 요약했습니다. 


커피를 갈고, 
뜨거운 물이 커피를 우려내게 하고, 
그걸 걸러서 마신다.


제가 가설로 세운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변수들은, 


커피 종류 (커피 원산지)
커피 로스팅 온도/시간
커피 입자 크기
커피를 우리는 물의 온도/시간/속도
필터 종류/필터 처리


변수를 하나씩만 바꿔가며 커피 실험을 거듭한 결과,


지금 현재 제 입맛에 가장 맞는 커피와 레시피는 다음과 같습니다.


커피 브랜드 --> 일리 
로스팅 방식 --> 블론드/미디엄
커피 입자 굵기--> 거친 덩어리가 없는 분말상태이되 너무 입자가 곱지 않게
물 온도 --> 물이 끓고 나서 10-20초 정도 식힌 물
커피 내리는 속도 (커피 농도) --> 천천히 우려서 진하게 
커피와 물 혹은 우유를 섞는 비율 --> 커피 : 뜨거운 물 = 2 : 8 정도
필터 --> 케믹스 전용 필터 (unbleached)를 뜨거운 물로 한 번 씻어낸 후 사용


저희 집에 자주 오는 (코로나 전) 손님들을 상대로 부가적 실험을 거듭한 결과, 스벅산 '아아' 혹은 '라테'나 '카푸치노'와 비슷한 맛도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커피를 입맛에 맞게 만들어 마실 수 있게 된 것은 저에게 상상 이상의 큰 행복감을 줍니다. 매일 커피를 내릴 때마다 얼마나 맛있고 얼마나 뿌듯한지!


어떤 재료로도 가지고 놀 수 있다고 자부하는 재료 공학도의 정신이 저는 참 마음에 듭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 전업 작가가 된다 해도, 재료공학도라는 정체성도 버리지 않고 제 주머니 한 편에 평생 넣고 다니려고 해요. 갑자기 이 재료공학도 정체성이 작가 정체성에게 한 마디 하네요.


"작가라면 어떤 주제로도 글 쓸 수 있는 것 맞지! 너도 나처럼 못쓰는 글 없기를...!"


오늘 커피 이야기하면서 비행기를 좀 태웠더니, 한껏 부풀어 오른 재료공학도의 자부심이 좀 얄밉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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