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기억력이 젬병이다.
어려서는 국가의 이름과 그 나라의 수도가 어디인지 다 외웠다. 어머니는 신동이라고 천재라고 자랑을 하고 다녔다. 그렇다 대부분 어머니에게만은 모든 자식이 천재였던 순간들이 있다. 돌아보면 다들 그 정도는 하고 있었다. 성장해 가며 그 순간들은 기억 속에만 남아 살아가는 데는 별 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비범했던 한 순간일 뿐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생각할게 많아지고 기억할 일들이 점차 뇌의 용량을 초과해 버리는 때가 오면 서서히 중요하지 않은 일들은 저장공간에서 쫓겨난다. 가끔은 뒤죽박죽 되어버린 머릿속에서 중요한 무언가도 함께 삭제하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내 머릿속은 어찌 된 것인지 좋았던 일보다는 좋지 않았던 기억들이 더 생생하게 더 많이 남아 있는 것 같다. 내 삶에 있어서 남들보다 안 좋은 일들이 더 많아서 그런 것일까? 다른 사람들도 그럴까?
나만 그렇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면 내 인생이 너무 초라해지잖아.
다른 사람들도 안 좋은 기억들만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고 실수로라도 삭제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지나 간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아가고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이렇게 스스로를 속이며 또 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다행인 것은 내 기억력이 남들보다 좋지 않아서 좋았던 나빴든 간에 기억의 총량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그중에 나쁜 기억들이 더 많긴 하지만 기억력이 좋았다면 나쁜 기억이 더 많이 살아남아 있지 않을까 싶다.
문제는 기억력이 나쁘다는 것에서 생긴다.
잠깐, 궁금하고 의아한 게 한 가지 떠올랐다. 기억력이라 함은 힘을 나타내는 '력'자가 들어가는데 정작 나는 '좋다' 또는 '나쁘다'라는 형용사를 쓰고 있다. '세다' 또는 '약하다'라는 단어가 더 어울리는 게 아닌가? 아마도 관습적으로 그렇게 써와서 그런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어쨌든 기억력이 나쁘든 약하든 어떤 단어를 쓰든 상관없이 평균보다 아래에 있다는 것은 불편하다. 때로는 문제를 야기시키기도 한다. 그것이 자의든 타의든 말이다.
어느 날 편의점에 들어온 손님들의 이야기다.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어오고 얼마 있지 않아 손님 한 분이 들어온다. 무리 중 한 사람을 A라고 하자. 그리고 나중에 혼자 들어온 손님을 B라고 하자. B가 A에게 다가가 아는 체를 한다.
B - "잘 지내셨어요. 이 동네에 살아요?" (너무 친근하게 아는 체를 한다.)
A - "죄송한데 누구시죠? 저를 아시는 분인가요?" (정말 모르는 사람처럼 대한다)
B - "나 몰라요? 작년에 Q회사에 같이 근무했잖아요?" (기분이 약간 상한 듯한 표정이다.)
A - "Q회사에 다닌 건 맞는데 누구신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죄송합니다." (이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듯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린다.)
B - "제 스타일이 많이 달라졌죠? 그때는 머리도 짧고 옷도 정장만 입었으니까..." (애처롭다. 알아봐 주기를 애원하는 듯 보인다.)
그들은 그렇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출입문을 나갔다. 그 후 상황은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
내가 본 이 상황을 내 주관적인 생각으로 풀어보면 이렇다. A는 B를 알지만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나간 과거가 어떻든 간에 그 관계를 미래로 연장하고픈 마음이 없음을 기억이 나지 않음으로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었을 것이다. B는 A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했음에 기분이 나빴을 것을 것이다. 아마도 자존감에 작은 생채기가 났을 것이다. 그 상처를 회복하기 위해 어찌 보면 집요하게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알아봐 주기를 강요하는 것 같았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붙임성이 좋은 것인지 분간이 안 간다. 자존심이 강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출입문을 나간 후 어떻게 이야기가 이어져서 어떤 결말이 났다고 하더라도 분명 두 사람 모두 썩 기분은 좋지 않았을 것이다.
편의점에서 일하다 보면 기억력에 따른 불편함과 오해를 경험하게 된다.
편의점에서 일하는데 기억력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겠지만 분명히 상관있다.
우선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해야만 단골을 알아볼 수 있다. 알아보지 못한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대부분 관종이다. 사람마다 농도가 다르긴 해도 같은 성분이 들어있기 마련이다. 어찌 보면 관종은 농도가 아주 짙은 자존감을 표현하는 말이 아닐까 생각한다. 같은 커피의 종류지만 자존감이 아메리카노라면 관종은 에스프레소 같은 느낌이랄까. 인간은 보이는 삶과 보는 삶의 균형을 맞추며 살아간다. 보이는 내가 보는 사람에게 있어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제나 기억해 주길 바란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단골손님이다. 내가 근무하는 날 항상 이른 아침에 오시는 손님이다. 어떤 날은 커피만 사가신다. 그리고 세 번에 한 번은 커피와 담배를 사가는 손님이다.
냉장고에서 꺼내 온 커피를 계산대에 올려놓고는 "담배"라고 짧게 한마디 하셨다. 순간 내 머릿속은 'AI'가 된다. 이 손님이 과거에 어떤 담배를 사갔는지 데이터를 돌려 본다. 아침에 답배를 사가시는 손님들은 30명 정도, 담배의 종류는 200여 가지(주로 팔리는 담배는 30여 종이다). 머릿속 'AI'는 그 경우의 수에다가 내 눈을 통해서 들어온 그 손님의 이미지를 대입시킨다. 순간 데이터가 꼬인다. 정답을 출력 못하고 버벅 거린다.
그 찰나의 순간에 손님이 담배 이름을 말해 주기를 눈빛으로 손님에게 전한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까딱하는 고갯짓' 뿐이다. 그 고갯짓의 말인즉슨 이런 거다.
"니 뒤에 있잖아? 내가 뭐 피우는지 모르니? 나 여기 단골이야!" 담배는 어느 편의점이나 근무자 뒤에 있다. 그래서 손님이 직접 골라오지 않는 유일한 상품이다.
여기서 잠깐 '술은 냉장고에서 손님의 손길을 기다리게 만들어 놓고 원하는 것을 직접 가져오게 하면서 담배는 왜 그렇게 숨겨놔야 해?'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다. 맞다. 술이든 담배든 계산대에서 성인확인을 하니 미성년자가 구매하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왜 답배는 근무자 등뒤에 꽁꽁 숨겨 두는 것이지. 그에 대한 내 답은 이렇다. 술이나 담배는 마진이 없다. 거의 세금덩어리다. 그런데 담배는 크기도 작고 단가도 편의점 물건들 평균가를 웃돈다. 남는 것도 없고 비싸고 크기도 작다면 거기에 미성년자에게 들어가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답이 되겠는가.
그 고갯짓이 내 기분을 순간 엉망으로 만들어 놓아서 그 기분을 가라앉히느라 잠깐 샛길로 빠졌다.
솔직히 그 고갯짓에 명치끝 부분을 무언가가 막아버리고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나이가 많고 늘 오시는 단골이라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그 순간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 손님을 마주 보고 있다가는 '욱'하는 성격에 '안 팔아요'를 외쳤을지도 모른다.
참 아이러니 하게도 등을 돌린 순간 그 손님이 어떤 담배를 피우는지 퍼뜩 생각이 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소심한 복수를 한다. 다시 손님을 행해 돌아서며
"어떤 담배 피우시죠?"라고 물었다. 속으로 '내가 당신의 취향을 일일이 기억할 필요는 없잖아!' 하면서.
그런 일이 있으면 나도 손님도 기분이 좋지 않다.
내 감정도 지키고 손님의 자존감도 지키는 방법을 기억력이 좌우한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거기에 기억력은 간혹 친철함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그 알바는 내가 뭘 원하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지 정말 친절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들 의외로 많다. 내 전근무자는 기억력이 좋은 것인지 친절하기로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다. 부럽다.
기억력을 힘으로 간주한다면 그 힘의 강약은 왜곡의 강약에 비례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 힘은 덤으로 친절함을 주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