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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하 Feb 27. 2023

영감님의 정체

글을 쓰는 중입니다

 갑자기 해결 안 되던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될 때가 있다. 요즘 그런 시기를 지나고 있다. 특히 글쓰기에 대해 많은 생각 정리가 이루어지면서 올해 첫 단편 작품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처음 글쓰기를 시작했을 때는 글의 분량 채우기가 목표였기 때문에 전체 구성에 대해서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이어질 다음 장면을 쥐어 짜내는데 정신이 없었다. 웹 소설계 언저리에 일하는 지인들이 하나같이 속도와 분량을 강조했기 때문이었다. 생각보다 분량 채우기는 성공적이었다. 나는 온종일 8~10시간을 의자에 매여 있으면 아슬아슬하게 5천 자를 쓸 정도로 속도를 맞출 수 있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나는 조금 더 전문적인 글쓰기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래서 찾은 게 바로 영감님, 뮤즈(Muses)였다. 다행히도 물 한 그릇도 떠 놓지 않고 독특한 소재를 떠올리게 해달라고 비는 철딱서니를 관대한 영감님은 응답해 주었다.

 살인마에게 가족을 잃은 게임 프로그래머가 살인마를 추적하는 게임을 만들어 라이브로 방송하는 이야기, 친구들과 우연히 놀러 간 클럽에서 마약상에게 찍혀 중독자가 된 회사원의 이야기.

 부끄럽지만 작년에 영감님이 응답해 준 소재 중 일부이다. 이것들이 떠올랐을 때를 돌이켜보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흐르며 혈관 속 피가 춤추었고, 컴퓨터 모니터에 입맞춤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냈다.

 결과는 나락이었다. 소재가 명확해지면 분량 채우기가 더 쉬워질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간신히 분량을 채워낸 글들은 이야기라 할 수 없는 산만한 글일 뿐이었다. 심지어 아무 생각 없이 분량만 채워 쓴 전 글들보다 못한 느낌마저 들었다. 분명히 무언가 잘못되었는데 뭐가 문제인지 짚어내지 못하는 와중에 영감님이 던져주는 가슴 뛰게 하는 소재들은 내 손에서 어딘가 장기 하나가 빠진 기형적인 글들로 바뀌어졌다. 팔다리가 한 쪽씩 없거나, 머리가 없거나, 가장 심한 건 심장에 커다랗게 구멍이 뚫린 내 글들이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혔다.


 궁하면 통한다더니 얼마 전에 그 답을 간신히 찾았다. 내 글은 다음 문장이 궁금하지 않았다. 글쓰기에도 밀당이 필요하다. 독자들이 호기심을 일으킬만한 문장을 제시하고, 그것에 대해 독자들이 상상하는 대로 다음 문장을 써내려 가면서 공감을 쌓아나가거나 그 상상을 비트는 문장을 제시해 생각지도 못한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해야 했다. 영감은 그런 감정의 떠오름이고, 이야기는 그런 감정에 대한 글이었다. 하지만 기존에 내 글은 데이트에 나와서 혼자 침 튀겨가며 하고 싶은 말만 일방적으로 하는 무뢰한과 다를 바 없었다.

 살인마를 추적하는 게임 프로그래머가 중요한 게 아니라 갑자기 가족을 잃고 괴로워하는 게임 프로그래머의 감정이 또는 어떻게 살인마를 처단하는지 그 과정이 중요했고, 마약 중독된 회사원의 기괴한 몸짓이 중요한 게 아닌 그런 그를 중독자로 만든 마약상의 시선이, 한순간에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변한 걸 받아들이는 가족의 감정이 중요했다.

 글의 구성이라는 뜻이 기승전결로 줄거리를 요약하는 게 아닌,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독자들의 질문에 답한다는 다른 의미가 생기면서 조금씩 내 첫 이야기가 완성되어가고 있다. 아직은 몸에 맞지 않은 옷을 입은 듯 어색하고 움직임도 불편해 하루 8~10시간을 의자에 매여 있어도 몇 문장 쓰지 못하는 날이 허다하지만….


 나는 글을 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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