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하의 On-Air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전철로 3 정거장 정도 떨어진 교육청 도서관으로 갑니다.
동네 도서관들은 주민분들 취향의 경제, 경영서가 많이 들어오거든요.
교육청 도서관은 동네보다는 신간 문학지나 소설, 철학서 위주로 많이 들어와서 나들이 가는 기분으로 가곤 합니다.
우연히 도서관 근처에 작은 생선초밥 달인집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회와 초밥을 좋아하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더라고요.
집에서 핸드폰으로 지도를 대충 찾아보니 초등학교 근처에 있는 것이 찾기도 쉬워 보였습니다.
한 가지 재미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핸드폰 없이 길을 찾아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 말이죠.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동안 핸드폰과 거리 두기를 시작했는데 그 짧은 시간이 주는 조용한 평온감이 좋았거든요.
반납할 책과, 빌려올 책 목록을 챙긴 후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둔 채 들뜬 마음으로 도서관으로 갔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찾는 둥 마는 둥 하며 머릿속은 온통 초밥의 윤기가 반질반질한 신선한 생선회와 그 밑에 새콤들쩍하게 적당히 간이 밴 밥뭉치를 떠올렸습니다.
혹시라도 브레이크 시간에 걸릴까 봐 여유 있게 도서관을 나와 지도에서 본 초등학교로 내달렸습니다.
그런데 지도에서 봤던 모습하고 실제 눈으로 확인한 초등학교 주변 모습이 매치가 안 됩니다.
생각보다 규모가 큰 초등학교는 대로변을 따라 두 블록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데 주변에 음식점이 있을 법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음식점들은 초등학교에서 대로를 건넌 맞은편에 몰려 있었기에 그쪽을 먼저 수색해 보기로 했습니다.
몇 번이나 골목골목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제가 찾는 초밥집은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브레이크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초조함에 괜히 핸드폰을 두고 와서 고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결국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분께 물어보기로 했습니다.
달인 초밥이니 동네 주민이라면 분명히 알 거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말이죠.
그런데 쉽게 용기가 나지 않습니다.
다들 분명한 목적지를 가지고 어딘가로 바삐 가고 있거나, 잠시 서 있는 사람들도 손에 핸드폰을 들고 무언가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때서야 깨달았습니다.
여기서 제가 조심스럽게 "저기요."라고 말을 걸면 도 전도사나 하느님 전도사로 보일 게 분명하다는 것을요.
화장기 없는 얼굴에 부스스한 머리, 낡은 목폴라와 청바지에 먼지 탄 패딩을 걸친 모습으로 40대 여자가 낮 시간에 길거리를 어슬렁거리고 있으니 충분히 오해살만 했습니다.
저는 누군가 길을 물어보면 순순히 대답해 주는 편이었습니다.
하지만 근래에 그런 작은 호의가 원치 않은 호객 행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보니 그 뒤로는 누가 저를 부르기만 해도 손사래 치며 바쁘게 길을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손사래를 제가 당할 차례가 된 것입니다.
이쯤 되니 핸드폰이 없는 게 아쉬운 정도가 아니라 그리울 지경이었습니다.
어쩌자고 소중한 핸드폰을 집에 두고 나오는 만행을 저질렀을까 반성하며 핸드폰에게 꼭 사과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배속에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에 결국 없는 용기를 짜내고 짜내 운동복을 입고 바삐 길을 가던 동네 아저씨를 붙잡았습니다.
아저씨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저를 훑어보다가 생각지 못한 음식점 질문에 당황하며 엉뚱한 곳을 알려주시고 다시 바삐 길을 가셨습니다.
초밥 사냥에 실패한 짐승은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습니다.
다시 대로를 건너 학교 옆을 지나는데 건물과 건물 사이에 좁은 길이 보였습니다.
딱 보기에는 건물 담장이 있을 법한 막힌 길이었지만, 굶주림에 지친 짐승의 촉으로 그곳에 무언가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브레이크 타임을 10분 남겨두고 초밥 사냥에 성공한 저는 기쁨의 함성과 함께 만찬을 즐기고 돌아왔습니다.
가끔 일상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던 것에서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핸드폰 없이 길 찾기 한 날도 그런 날이었습니다.
인간보다 기계에게 생각 이상으로 의존하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거든요.
엔데믹이라는 말조차 식상해진 요즘인 것 같지만, 코로나19는 생각보다 우리를 많이 변화시켰습니다.
같은 동족인 인간과의 거리는 접촉만으로도 꺼림칙할 만큼 멀어지고, 대신 기계와의 거리는 없으면 분리불안증이 올만큼 가까워졌습니다.
이제는 부모님 세대도 키오스크 사용 정도는 하지 않으면 음식 주문을 할 수 없는 세상이니까요.
그래봤자 기계는 인간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쇳 덩어리일 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쇳 덩어리에게 인간은 인격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기에 우리는 추상적인 것들조차 쉽게 인간화하여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건 우리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인간화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죠.
그리고 사회라는 건 애당초 자연에 대한 두려움으로 모인 인간 집단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생존 편의를 위해 모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간은 사회를 만들고 문명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두려워하는 건 자연이 아닙니다.
이제 자연은 우리가 지극 정성으로 돌봐야 할 노부모 같은 느낌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같은 인간입니다.
근래 '핵개인의 시대'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려옵니다.
그리고 일부 지식인들은 능력 있는 개인에게 기회의 시대가 열렸다고 합니다.
저는 '핵개인'이라는 신조어가 두렵습니다.
사회가 해체하고 있는 현상을 도전, 성공, 기회 같은 반짝이는 말들로 겉만 화려하게 포장하는 느낌이라서요.
역사적으로도 인간은 항상 뭉쳐있지 않았습니다.
사회 외적으로 두려움이 크면 뭉쳤고, 사회 내적으로 두려움이 크면 흩어졌습니다.
동족인 인간이 두려워 멀리하는 각자도생의 시대, 서글픔 속에서 작은 기쁨의 빛을 찾을 수 있기를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