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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원에 대한 의문, 결핍, 외로움

수도생활은 독서로, 명상으로

-(심리상담사가 검사결과지를 보면서) 

타고난 기질이 대단히 특이하세요. 특히 한국에는 잘 없는 성향이라 사회생활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주류회사 마케팅 파트장이라고 하셨죠?  이 정도는 거의 기적이라고 볼 수 있어요. 그동안 마음고생 많으셨겠네요.


- (나) 

저는 늘 높고 좁은 담벼락 위를 걷고 있는 기분으로 살아요. 담벼락의 한쪽은 찬란하게 밝은 하얀색, 다른 한쪽은 깊고 어두운 검은색이요. 나이가 들수록 그런 느낌은 더 심해지는 것 같아요. 스펙트럼의 양 끝단에서 그야말로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가며 균형을 잡는 것. 분명 매력적인데 아슬아슬 위태로워요.



10대 때에는 정신과 상담을 받았었고, 스스로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는 심리 상담을 오랫동안 받아왔다.


오래전부터 늘 무언가를 갈구하는 기분으로 살았다. 정확히 정의할 수 없는 그 어떤 근원에 대한 의문, 채워지지 않는 결핍, 외로움.


친구들이 교실에 앉아 자습할 때 나는 복도 창가에 책상을 두고 앉아 시시때때로 변하는 구름을 보며 터무니없는 상상과 웅장한 스토리를 만들어 내곤 했다. 첫 직장이 테헤란로에 위치한 영국계 회사였는데, 퇴근하던 어느 날, 내 몸 어딘가 작은 바늘구멍으로 뼛속 시린 황소바람이 들어오는 걸 생생하게 느꼈다. '아, 이건 누가 곁에 있다고 채워지는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 결핍이 아니구나'라는 걸 각성한 날이다.


이 각성을 계기로 나는 더욱더 그 근원에 다가가고 싶었다. 결핍을 채우고 싶었다.


그래서인지, 30대에는 자주 수도원으로 갔다. 휴가를 내고 며칠씩 봉쇄수도원에 가서 새벽부터 시작하는 수도자의 생활을 함께 했다. 며칠 동안 대침묵을 하면서 내면이 비워지면 다시 세상에 나오고, 가득 차면 또 수도원으로 들어가, 며칠간 수도자의 생활을 하면서 비우고 또 세상에 나오고. 수년을 반복했다.


나의 내면은 계속 세상과 삐그덕거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가득 차면 숨쉬기가 어려웠고 그러면 어떤 식으로든 비워내야 했다. 살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대침묵: 어떤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고 침묵하는 수행법으로 혼잣말과 생각도 침묵에 포함된다.)

 


수도생활은, 독서로 또 명상으로 이어져


반복되는 수도생활은 독서로 이어졌고, 독서는 명상으로 이어지고 확장되었다.

나의 독서는 정보 습득이나 자기 계발, 오락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테헤란로를 걸으며 느꼈던 그 황소바람 같은 결핍을 채우고 싶었고, 내면에서 올라오는 근원적 무언가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다. 누군가 나와 비슷한 의문을 가진 사람이 있었겠지. 누군가는 그 해답을 찾아 기록한 사람이 있겠지.



20년 정도 지난 지금도 나는 근원적 해답을 찾지 못했고 여전히 결핍 상태이다. 하지만 예전처럼 불안해서 수도원을 피신처로 삼지는 않는다. 아슬아슬 위태로운 상태도 아니고. 


이상하게 그 어떤 똑 부러진 해답을 찾은 것도 아니고 달라진 건 없는데 평온하다. 아마도 그동안의 독서와 명상, 한적한 곳에서의 생활이 '나의 세계'를 평화롭고 따뜻하게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문득 떠오른 생각인데,,

어쩌면 20년 전 내가 테헤란로를 걸으며 각성한 근원에 대한 질문과 결핍은 애초에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걸 찾고자 하는 과정 자체가 삶을 살아가는 의미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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