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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꽃뜰 Apr 04. 2020

독후감 어느 밤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중 윤성희 소설

일주일 전, 나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훔쳤다. 손잡이에 거북이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 있는 분홍식 킥보드였다. 발판에는 파란색으로 장민지라는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하하 나이도 한참 든 그녀는 왼발을 판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오른발로 밀며 그 킥보드를 타고 놀이터를 한 바퀴 돈다. 밤마다 나가서 킥보드를 탄다. 장민지라는 아이의 킥보드를 타고 달님을 보며 별님을 보며 아파트 주위를 돈다. 그러면서 밤늦게 까지 불이 켜진 아파트의 어느 집을 바라보기도 하고, 남편과의 첫 만남을 추억도 하고, 잘 나가던 집에 어두움이 깔리던 때도 회상하며 지금 남편이 없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한다. 남편과 싸운 날은 킥보드를 타고 자전거 도로를 돌며 노래까지 부른다. 누가 보면 미친년이라 하겠다는 생각까지 하면서도 돌고 또 돈다. 그러다보니 밤마다 킥보드 타는데 자신감이 생겨 어느 밤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 단지까지 간다.  


새 아파트 단지라 그런지 단지 내에 산책길이 많았다. 킥보드를 타기에도 좋았다. 그래서 속도를 냈다. 내리막길에서도 멈추지 않았다. 넘어지면서 나는 킥보드 손잡이에 왜 거북이 모양의 스티커가 붙어 있는지를 알아차렸다.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그래. 그건 경고문이었다.


한밤중 나이도 꽤 든 여자가 애들 킥보드를 타다가 넘어져 밤하늘을 보며 남편과 딸과 매우 좋았던 때를 떠올린다. 몸도 떨리고 발도 안 들어지고 팔꿈치로 땅을 디디고 상체를 일으키려니 으악! 척추부터 엉덩이까지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간다. 큰 일이다. 핸드폰도 없다. 한밤중이다. 그러나 생각은 추억 속으로만 냅다 달린다.


빗방울이 이마에 떨어졌다. 비를 맞자 웃음이 났다. 쌤통이다. 쌤통이야. 차라리 비가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발견한 청년은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원래는 밤을 새울 예정이었는데, 빗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를 가만히 듣다 보니 헤어진 여자 친구가 생각났다. 오 년을 사귀는 동안 한 번도 싸우지 않아서 친구들한테 비현실 커플이라고 놀림을 받곤 했다. 그런데 싸우지 않고도 헤어질 수 있더라고요. 청년은 내게 말했다. 그럼. 그럼. 사랑하지 않고도 평생 사는 사람도 많아. 나는 그렇게 말했다.


청년은 응급차를 부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캄캄한 밤에 나이 많은 그녀는 그 청년과 많은 이야기를 한다. 불행하고 가난해 보이지만 동생을 먼저 생각하는 갸륵한 청년에게 그녀도 가족 이야기를 한다. 그 밤에 그 빗속에. 구급차가 곧 올 것이라는 청년에게 나중에 만나면 맥주 한잔 사주겠다 하니 청년은 이왕이면 치킨도 같이 사달라 한다. 그냥 많이 슬프면서 무언가 따뜻하다. 청년도 이 나이 많은 여자도 모두 행복하면 좋겠다. 책을 다 읽고도 며칠 킥보드를 타고 쌩쌩 쌩쌩 아파트 단지를 도는 그녀가, 아니 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쌩쌩 쌩쌩


<2019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중 대상 윤성희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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