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자유로운 콩새 Feb 24. 2021

절망에서 희망을 경험해보셨나요?


전편을 참고하시면 더 도움이 됩니다.

https://brunch.co.kr/@hee91801/50




4. 절망과 희망이 공존하던 중국 감옥에서.


미얀마에서 중국 감옥으로 이송되는 차 안에서 우리는 초긴장상태였고 절망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미얀마에서는 북송의 위험은 없지만 중국에서는 북송의 위험이 95%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지프차 뒤 좁은 공간에 5명을 꼬깃꼬깃 구겨 넣은 중국 경찰은 먼지풀석풀석 날리며 미얀마 - 중국 국경을 다시 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참 허무하게도 긴장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 가고 있습니다. 

정말 억울했고 숨 막히게 막막했습니다.


차 안이 너무 좁아서 몸은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으나 손목에 채워진 수갑은 약간 헐거워서 저처럼 작은 손목은 뺄 수도 있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했죠. 어차피 북송되면 북한 가서 처참하게 목숨을 잃을 건데 그렇게 비참하게 수모를 당하기보다 지금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는 것이 훨씬 깔끔하고 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말 그러고 싶었습니다. 

뒷 일의 걱정을 말끔하게 해소할 수 있는 가장 편한, 가장 최선의 방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죠.


하지만 돌이켜 생각하면 저한테는 저를 의지하고 따라오고 있는 4명의 동생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나이가 제일 많다보니 자연스럽게 리더 격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장 달리는 차에서 뛰어내리고 싶기도 했지만 제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생각 또한 저를 강하게 붇들고 있었고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는 동생들에게 안정감을 주어야 한다는 책임감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말을 못 하도록 경찰이 감시하지만 저는 소곤 거리며 서로에게 주의를 주었습니다. 

" 우리는 조선족. 돈 벌러 태국. 고향은 각자 알아서. 무조건 같은 진술 반복, 반복.  원칙 지키자. 서로 믿고 신뢰.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끝까지 함께 한다." 

공안이 대화를 못하게 감시하고 있어서 길게는 어렵지만 짧게 한 마디씩 무한 반복하면서 서로 주먹 꼭 쥐고 격려하며 다짐했습니다.


곤명에 있는 중국공안국에 도착하자 차에서 내린 우리를 건물 벽에 붙여 세워놓고 각각 한 명씩 정면 사진과 측면 사진들을 찍더니, (이런 사진 행위는 한국에 들어와서 국정원 조사 때도 같은 방법이었습니다. 하하) 그러고는 

모두 함께 횡열로 세워놓고 사진을 찍은 다음 감방으로 가두었습니다.


처음에 우리를 한 사람씩 각각 다른 방에 가두고 개별조사를 진행했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어떻게 진술했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서로가 했던 약속대로 중국 조선족이며 돈을 벌려고 태국으로 가고 있었고 안내하던 중개인이 있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등 내용으로 진술했습니다. 


중국 연변의 주소를 대충 둘러대기는 했지만 불행중 다행인 것이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의 전국 인터넷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 공식적인 신원조회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답니다. ㅎ 별의별 방법으로 운명의 신께서 저의 편이 되어주셨어요.^^


나는 끝까지 자백하지 않았는데. 우리 어린 친구들은 어찌 되었을까. 경찰이 회유하고 얼리고 너만 집이 보내줄게  하면 사실 무너질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북송되면 어떻게 될지 우리 모두가 잘 알기 때문에 북송만은 피하고 싶죠.  설사 누구든 마음이 변한다 해도 원망할 수 없습니다. 이해해야 합니다. 그만큼 잡혔을 때의 절망감은 컷고 북송된다고 생각할 때의 공포는 살 떨릴 만큼 무서웠습니다.

개개인의 조사를 다 마치기까지 거의 10일은 걸린 것 같아요. 이후 우리를 한 방에 가두었습니다.

21살 되는 제일 어린 친구(16살에 북한을 떠나 중국에서 떠돌이 하던 친구입니다)가 제일 마지막까지 조사를 당했습니다. 고맙게도 모두들 처음 약속을 끝까지 지킨 듯합니다.  어린 친구가 제일 약한 고리여서 끝까지 회유했었나 봅니다


"우리는 너희들이 북조선 사람이라는 걸 다 안다. 솔직하게 불면 너만 보내줄게" 이렇게 회유하다가 

" 다른 사람들은 다 불었는데 너만 아니라고 할 필요가 있느냐. 언니들은 다 집에 갔다"는 등 어린 친구를 시험에 들게 했다고 하네요.


그래도 이 어린 친구는 끝까지 언니들과 했던 약속, 차 안에서 제가 두 번, 세 번 다짐해 두었던 약속, 누구 한 사람이라도 자기만 살겠다고 마음 바꾸지 말자는 약속을 끝까지, 끝까지 지켜냈습니다.

동생들이 너무 고마웠고, 너무 의젓했고, 너무 장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5. 절망에서 다시 희망으로


하지만 감옥생활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밥 먹고 화장실 가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있는 가장 큰 문제는 "여성 생리해결"이었습니다. 생리대 같은 것은 꿈도 못 꾸었고 대책을 요구하니 신문지 뭉치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신문지 뭉치가 생리대로 사용됩니다. 여성분들은 다 아시죠. 한 방에서 생활하는 여성들인 경우 한 사람이 생리를 시작하면 날자에 상관없이 줄줄이 함께 전염되어 시작됩니다.


누가 누구를 돌보고 신경 써주고 할 상황이 안된다는 거죠. 이런 상황에서 생리대로 사용해야 하는 신문지도 턱없이 부족했으니 우리 생활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정도가 못 되는 것입니다.


검은색 비닐봉지의 양 귀퉁이를 잘라내어 팬티를 만들었고 거기에 신문지가 생리대로 사용된 거죠. 

한국에 와서 우리끼리 그때의 이런 이야기들을 서로 나눌 기회가 있었는데요. 

동생들이 언니.. 그때 생각하기도 싫어요.. 하지 마세요~`하며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환경의 어려움은 이럭저럭 참을 수 있지만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심리적 불안은 참을 수 없는 공포였습니다.

공안은 우리가 북조선 여인들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심증은 있지만 자백하지 않으니 물증은 없는 것뿐이죠.  맨날 우리한테 북송시킨다고 엄포를 놓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이 있었지만 당시 저는 당시 "안전면도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북송 상황에 처하게 되면  내 몸이 비참하게 욕되게 하기보다 신속하고 깔끔하게 모든 것을 정리한다는 무언의 각오를 우리 모두는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30대였지만 이 어린 친구들은 20대입니다. 한참 활짝 피어나고 있는, 아름다움이 극에 달해있는 가장 예쁜 20대, 죽음을 생각하기에는 온몸이 조여올만큼 억울하고, 무섭고, 슬픈 것입니다.


그곳에서 의지할 분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크리스찬이거든요.

브런치에서 가능한 신앙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하는데요. 

이때 당시를 버터냈던 데는 사실 신앙의 힘이 컸습니다. 


중국을 떠날 때 저는 이 친구들의 손을 꼭 잡고 기도했었습니다.


           " 주님,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자녀들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해 놓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대한민국으로 가려고 출발하고 있습니다. 두렵고 위험한 여정입니다. 주님께서 지켜주실 줄 믿습니다. 

            이 어린 친구들을 이끌고 대한민국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주시옵고 지켜주시옵소서.

            모세에게 주셨던 능력의 지팡이에 의지해서 갈 수 있도록 인도하고 허락해 주시옵소서.

            이 어린 자녀들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축복의 시간이 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우리의 여정을 지켜주시옵소서"


어린 친구들은 크리스천이 아니었으나 출발 당시의 두려움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얻으려고 큰 소리로 '아멘, 아멘'을 웨치며 의식적으로 용기를 충전하면서 기대를 가지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지금 감옥에서 다시 기도 합니다.


          " 홍해의 기적을 이루신 주님. 약한 자와 강한 자 사이에서 구원해주실 분은 오직 주님뿐이십니다.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해 주시옵소서,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해 주시옵소서,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해 주시옵소서." 


감옥 안에서의 간절한 기도, 정해진 시간이 따로 없는 우렁찬 찬양 그것은 절망이 감도는 중국 감방에서 우리를 지탱해주는 힘이었습니다.


기도를 하면 할수록 저는 여기서 살아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점점 더 강했고, 설사 북송된다고 하더라고 그것이 하나님, 당신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르겠다고 고백을 할 수 있었고, 그래서 결국 다음이 걱정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어린 동생들에게 용기를 주고 다독이면서 견뎌냈습니다.

서로 으쌰으쌰 하면서 절망에 빠져있지 않도록 북돋아주었습니다.  희망을 품고 긍적적인 생각으로 마인드 컨트롤 하니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 표정은 점차 밝아지고 안정되었습니다. 


자다가도 한밤중에 문득 깨어나 두려움에 몸을 떨며 "언니, 안아줘요. 기도해줘요, 찬송불러줘요." 할 만큼 두려움과 공포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했습니다. 사실 안치 앞도 판단할 수 없지만 우리는 서로의 격려 속에서 희망을 보았고 그것으로 공안경찰과의 정신적 싸움에서 승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감방이 떠나가라 노래 부르면 시끄럽다고 문을 두드리지만 이미 희망, 밝은 빛을 느끼고 그것을 맞받아 마중가는 우리의 의지력은 거침이 없었고 나중에는 공안도 모른 체 하더라고요. ㅎㅎ


당신은 절망에서 희망을 경험해 보셨나요? 희망이 안 보인다고요?

절망이 너무 깊어서 찾아도 찾아도 어둠뿐이라고 생각되시나요?


희망은 내가 만드는 것이고 내가 찾아내고 내가 붙잡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긍정적인 의지를 가지고 희망을 부르면 내면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희망의 빛에 의하여 우리의 표정이 밝아지고 그 밝은 표정이 점차 절망을 밀어내게 되는 거지요. 


눈앞의 상황 앞에 주저앉지 않거나, 포기하지 않으면 희망은 언제나 내편이라는 경험을 여러 번 했습니다. 

절망 옆에 희망도 있다는 거죠. 중요한 건 우리의 마음가짐입니다. 희망을 선택하는 건 우리 자신이었습니다.

감옥에서도 결국 절망과 희망과의 싸움에서 희망이 승리했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중개인 총책을 비롯하여 바깥에서의 또 다른 노력도 매우 적극적이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우리의 절대적인 불복과 함께 감옥 밖에서는 관계되는 사람들이 공안에 '로비' 하면서 우리의 석방을 위해 노력하는 등 안팎으로 합심 덕에 결국 우리는 석방됩니다. 긴 시간 감옥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하루 이틀도 아닌 그 시간이 우리에게는 우리의 삶 전체와 맞먹을 것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결국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준비하고 드디어 대한민국으로 출발합니다.

북한을 떠나 넓은 중국 땅을 가로질러 미얀마, 라오스, 태국을 거쳐 대한민국으로 이르는 긴 여정입니다.


                             북한 = 중국 = 미얀마 = 라오스 = 한국


장장 해수로 4년이 걸렸네요^^




참고

지난편에 어느 작가님께서 혹시 대사관에 들어가는 방법이 안되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어주셨습니다.

감사드림니다. .저희들의 힘든 상황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어서 주신 질문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그것이 어려웠습니다. 

저도 한번 한국 대사관으로 뚫고 (문이 열렸을 때 뛰어 들어갔습니다. ㅎㅎ) 들어갔습니다. 망명 신청을 했더니 이것 저것 묻고 몇시간 빈 방에 방치해 두었습니다. 그러고는 이곳에서 나가라..안나가면 중국공안에 신고해서 잡혀나가게 하겠다고 하면서 위협했습니다. 너희가 이곳에 있으면 남한, 북한, 중국과의 관계 모두가 번거로워 지니 우리는 당신을 내보내거나 신고할 수 밖에 없다...하면서 쫓아냈습니다. 그래서 대사관에서 쫓겨났어요. ㅠㅠ

한국오면 당시의 영사를 찾아가서 가만놔두지 않을거라 생각했었거든요...ㅎㅎ

특별히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면 대사관은 매우 번거로워 하는 것 같아요. ㅎㅎㅎ

이전 11화 그 순간 희망은 절망이 되었습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