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르른도로시 Nov 07. 2022

내가 요가를 하는 이유

불안을 낮춰주는 약을 받았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먹으면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부작용으로 간혹 두통이 올 수 있고, 사람에 따라서는 효과가 별로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도 처방과 함께 따라왔다. "어떤 약에나 부작용은 있으니까요." 라고 하셨다. 그렇다. 어째서인지 정신과 약에 한해서는 기준치가 한 없이 박해지는 현실이지만, 사실상 부작용이 아예 없는 약이란 없을 테니까.


어제 10시쯤엔가 잠이 몰려와서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쉽게 잠들겠구나 싶었더니 약 1시간 쯤 후에 눈이 번쩍 뜨였다. 오한이라도 든 것 처럼 몸이 떨리면서 돌연 불안감이 엄습했다. 이유도, 형태도 없는 검은 그림자에 온 마음을 덥썩 물리면 혼자 힘으로 벗어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어린애들이 어두운 곳에서 느끼는 공포와 비슷한 감정인 것 같기도 하다. 다른 점이라면 나는 이미 그런 것 따위에는 진즉에 익숙해졌어야 할 성인이라는 것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이름을 알 수 없는-물어보는 것을 깜빡 잊었다-'불안을 낮춰주는 약' 한 알을 집어 입 안에 털어넣었다. 따뜻한 온수 매트 위에 누워 두터운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어울리지 않게도 벌벌 떨며 잠을 자려고 애쓰다가 그 '순간'을 느꼈다. 마법처럼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 '순간'을. 정신과 약이 개발되기 전에 인류는 두려움을 어떻게 견뎌냈을까. 개개인의 힘으로는 감당하지 못할 두려움을 떨치기 위해 그토록 수 많은 토템들과 신화, 전설들이 만들어졌던 걸까. 지금도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입으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중에는 온갖 말도 안되는 귀신 이야기가 많지 않던가. 필시 실제로는 존재 하지도 않을 그 이상한 귀신들-'짤딱발이'와 같은 되도 않은 이름을 가진-은 조상들이 불안의 렌즈로 본 환상 속의 생물들일 터. 


두려움이라는 건 인간이 동물이기 때문에 가지게 마련인 본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다가 불현듯 깨서 이유도 모른채 벌벌 떨며 밤새 뜬 눈으로 지새야 하는 일을 그야말로 예고도 없이 감당해야 하는 일은 분명 언제 겪어도 쉽지 않다. 이럴때 가장 빨리 나를 달래 주는 건 쉼호흡도, 명상도, 따뜻한 차 한잔도 아닌 정신과에서 받아온 약이다. 전혀 낭만적이지도, 위로가 되지도 않는 둥그런 모양의, '약'.


나는 잠을 조절할 수 없다. 감정이 오고 가는 것을 예측할 수도 없다. 잠에서 갑자기 깨버리는 원치 않는 상황에 맞딱뜨려야 할 때가 있듯 불쾌한 감정이 밀려와도 손 쓸 도리 없이 그저 참고 견뎌야 한다.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쳐도 오로지 시간만이 해결해 주는 일들이 세상에는 무지하게 많다. 어떤 때는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대체 있기는 한지 의심이 가기까지 한다. 마음도, 수면도, 의지력도 내 뜻대로 통제할 수가 없다. 삶이란게 워낙 복잡하기 때문이다. 거기다 '나'라는 존재는 기질적으로 편하도록 생겨먹지 않은 것 같으니, 더더욱 통제가 안될 수 밖에. 수면도, 생각도 탱탱볼 몇 백개를 사방이 막힌 공간 안에 한꺼번에 던져 놓은 것과 같아서 쉽사리 낚아챌 수가 없다. 이 놈의 탱탱볼들은 아니, 탱탱볼이 아니라 토끼가 아닐까. 다리라도 달렸는지 붙잡으려 하면 1000m씩 높이 뛰어 버린다. 기다려, 같이 좀 가자.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건? 나의 '몸'이다. 정신이 마구잡이로 튈 때 약 외에 유일하게 '조절'할 수 있는 것, 신체를 단련함으로써 표류하는 정신을 붙들어 놓는다. 나는 여러가지 메소드 중 요가를 선택했고, 그 중에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시퀀스가 정해져 있는 정통요가를 선택했으며, 매트 놓는 예절까지 지도하는 깐깐한 선생님께 배우기를 택했다. 보다 자유로운 움직임, 자율성을 주는 선생님과도 수련해 보았으나 어디든 튀어나갈 공백이 보일 때 나의 정신은 그 텅 빈 공간을 향해 기꺼이 달려갔기에, 어쩔 수 없이 그토록 좋아하는 '자유'대신 '구속'을 선택해야 했다. 아이러니 하게도 내 정신과 몸은 특정한 틀 안에 갇혀 있을 때 안정감을 느꼈다. 삶의 무의미함에 대해서 덜 생각하게 됐고 후회라는 걸 덜 하게 됐다. 신체를 특정한 운동이라는 '틀'안에 집어 넣자 정신이 덜 산만해졌다. 군살이 빠지듯 마음의 잡스러운 지방 덩어리가 컷팅 되었다. 어느 순간에는 습관처럼 과거를 반추하던 버릇까지 무자르듯 싹둑 잘렸다. '내가 그때 대체 왜 그랬지.'에서 '후회해봤자 소용 없는 일을 생각하며 자신을 괴롭히지 마.'로 정리가 되었다. 그렇다. 신체를 단련하면서 마음이 함께 단단해졌다. 무슨 대단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말은 아니다. 적어도 이 세상을 '견딜만 한'수준까지는 강해졌다는 얘기다. 그 정도면 되었다. 내 목표는 조금이라도 살맛나게 사는 거지 도를 닦아서 성인군자가 되는 게 아니니까. 


  

4개월여를 요가를 하지 않고 지냈더니 금새 다시 불안 증세며 반추적 사고가 돌아왔다. 꾸준히 약을 먹었음에도 약만으로는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의사선생님들이 그토록 강조하시던 인지행동치료, 정신치료의 몫을 요가가 톡톡히 하고 있었나 보다. 


그럼 언제까지 요가를 해야 요가를 하지 않아도 썩 괜찮은 상태로 살 수 있을까. 현재의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일본의 소설가)무라카미 하루키가 30년동안 달리기를 해왔듯이, 그리고 별 일 없으면 앞으로도 달리기를 할 예정이듯 나 또한 앞으로 죽을때까지 요가를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루키에게는 그 도구가 달리기였고-하루키가 말했듯이 달리기는 선善이 아니다. 달리기는 그저 달리기일 뿐.-나에게는 그 도구가 요가인 듯 하다. 


내가 요가를 선택한 이유는 요가와 인연이 닿았고, 인연이 닿아서 하다보니 할 만 했고, 요가 외에는 운동 싫어하는 내가 견딜만한 다른 신체 단련법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요가라도 발견해서 천만다행이라고 늘 생각한다. 요가마저도 견딜 수 없었다면 나는 무엇으로 이 표류하는 정신을 붙들어 맬 수 있었을까.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요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동물이기 때문에 움직임을 통해서만 정신의 균형을 예리하게 다듬을 수 있는 듯 하다. 글, 음악, 미술-이것 또한 인간의 몸이 행하고, 또 신체성이 반영된다는 점에서 신체 활동이기는 하나- 그 어떤 방법을 써도 해결할 수 없는 미묘한 영역이 움직임으로 치유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니, 하루키의 말을 빌자면 '실감(체감)'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요가를 한다. 아니, 요가를 하려고 '노력(시도)'한다. 



작가의 이전글 불확실성이라는 파도를 즐기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