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다짐 나 먼저 시작하고 있어요.
악명 높은 독일 겨울 날씨 덕에 운동보다는 책에 더 손이 간다. 낮이어도 집안에 불을 켜야 하는 안개 자욱한 날씨에 다음 주면 또 다른 새로운 년도가 시작된다니 괜스레 청소를 해야 할 것 같고 정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어찌 보면 연휴 이휴의 주말일 뿐이기도 한데 말이지. 엊그제 밤베르크에서 돌아와 크리스마스 당일 저녁은 친구집에서 보냈다. 오래간만에 도란도란 와인도 나눠마시며 적당한 수다를 하다 보니 크리스마스고 뭐고 잘 느껴지지도 않고 그저 평범한 어느 날 저녁 같아 더 좋았다. 연휴로 한껏 올라가 있던 기운이 점차 가라앉으면서 잠깐 미뤄두는 사이 사방팔방 분산되었던 해야 할 일들의 목록이 머릿속에서 차근차근 순서를 잡아가는 기분이었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올 한 해가 다 지난 기분이고 사실 그렇기도 하다. 얼마 안 남은 12월 31일을 독일에서는 '실베스타 Silvester'라고 부른다. 이 역시 종교적인 이유가 뒤따르는데 4세기 교황 실베스테르 1세가 12월 31일 세상을 떠나며 그의 기념일이 되었고 이후 새해맞이 축제가 연결되면서 생겨난 축일이다. 일반적으로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보내는 명절이라면 실베스타는 친구들과 실컷 노는 파티하는 날이고 폭죽 터뜨리는 날이다. 한국에서 겪었던 귀엽게 뽀짝 놀라게 하는 폭죽 아니고 가끔 사망사고까지 나는 전쟁 같은 폭죽이 사방천지 터지는 날.
모두가 새로운 날을 맞이하며 마음을 다잡고 계획하고 지난 한 해를 정리하는 이 시기가 나는 매번 흥미롭다. 늘 똑같이 흐르는 시간을 인류 문명이 자연의 흐름을 바탕으로 시간의 경계를 정했다. 하루는 24시간, 한 주는 7일, 1년은 365일이라고 수천 년 전에 우리끼리 정하고 그 약속을 잘 따르며 매해 축하를 하는 것이다. 12월 31일의 밤과 다른 날들의 밤이 다를 것이 하나 없는데 온 세상이 소비를 하고 사람들의 감정은 너울 치며 매일 뜨는 해가 유독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나도 마찬가지로 새해에 의미를 부여하고 기대를 하고 있다. 남들 지키는 거 따라 잘 지키는 나니까.
돌아보면 한 번도 새해 다짐을 야무지게 세워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새해라고 다를 거 없다는 생각이 바탕이 되었기도 했을 것이고 누군가에는 계획을 세우는 행위자체가 동기부여가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렇지 않다. 12월 31일 밤 12시 제야의 종이 울리면 남들과 덩달아 환호했지만 마음만은 차분했다. 이렇게 한 해가 갔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긴 했지만 내년에도 그럭저럭 잘 지내길 바라는 추상적이고 소극적인 바람이 전부였다. 나를 잘 표현하지 못하는 내 기질이 비단 남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내가 희망하고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는 서투름이다.
시간이 유독 많았던 2025년이었고 그에 비해 심적 여유는 없었던 한 해였기에 자책도 많이 했다. 한 달, 한 달 지나는 속도가 매우 빠르게 느껴졌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이 사라지는 게 몸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내 영혼도 사라질까 봐 불안하기만 했었고 조금이라도 찾을 수 있는 나의 잔재를 찾아 기록하기로 했다. 흔히들 말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자'까지는 기대도 안 했고 그저 내가 여기에 이 시간을 지내왔음을 표시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좋아하는 것은 내가 죽을 때까지도 모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걸 찾아 헤맬 수만은 없었다.
일상이 건조하고 각박했지만 내 마음만큼은 촉촉하고 싶었다. 얼마 없는 연락하는 이들에게 되도록 친절하고 싶었고 다정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상태가 매우 아슬아슬하다니 그게 표 나지 않을 수 없었고 주변이들의 걱정을 사기도 했었다. 늘 감사했고 감사하다고 정성껏 표했지만 온전히 닿지 못했다. 늘 자신이 없어 적당히 나를 가린 채로 감사하고 친절하면 소용이 없었다. 매번 친절하지 않고 감사하지 않아도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 체 함께 하는 것이 무엇보다 관계의 따뜻함을 높여주는 것인데 그게 참 어려웠다. 평가받을까 두려웠고 남을 불편하게 할까 신경 쓰여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나름 호의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면 나를 보호하기 위한 습관이었다.
아직 새해가 시작하기 전 올 해의 마지막 주지만 나 홀로 좀 이르게 새 계획과 다짐을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수백 번도 더 본 광고문구 같은, 자기 계발서의 홍보글 같은 말 - 나를 솔직히 표현하기. 남들에게도 나 스스로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