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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알려줘 2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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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오 Sep 15. 2024

<이별시대> -3-

태경

버스가 모퉁이를 돌자 잠무까지 10km 남았다는 이정표가 나타났다.[1] 눈앞이 부예질수록 안도감도 따라서 깊어졌다. 엄마가 찾아온다 해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가 나를 자욱이 감싸줄 것이다. 잠무에 대해 아는 바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도심에서 따로 떨어진 곳이기도 하고, 이렇다 할 명물도 없어 지나가다 목격하는 사람도 없을 테다. 번호를 다시 한번 바꿨고 잠무에 도착하자마자 등본열람을 제한할 계획이다. 집도 구해 놓지 않은 채 간단히 가방을 챙겨 버스에 올랐다. 잠무에 가기 위해서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남쪽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내려서 다시 한번 갈아타야 했다. 아무래도 좋았다. 아주 꽁꽁 숨어주지, 당신이 나를 버렸듯 나도 무참히 당신을 버릴 거야. 유치한 마음이 들었다. 아니, 당신은 나를 가진 적이 없으니 버린 적도 없어. 당신을 나에게 주지 않았듯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니겠다.

사랑이라고 믿은 것의 대부분은 스스로를 향한 눈속임이었다. 엄마와 아빠의 관계로 거슬러 가봐도 내 말이 맞다. 아빠는 말하곤 했다. 지천에 벚꽃이 흐드러져서 네 엄마를 만나러 가는 길이 온통 꽃길이었다, 우리가 만나는 걸 세상이 기뻐하는 느낌이었다고 했다. 아빠는 장가를 가기엔 늦은 감이 있는 나이에 엄마와 소개로 만났다. 어느 봄 분칠도 없이 핑크색 립스틱만 짙게 바른 작고 마른 엄마를 보았을 때 아빠는 여지없이 이 여자와 결혼을 결심했다. 엄마는 크게 좋고 싫음을 말하지 않았지만 아빠가 만나달라고 하면 마다하지 않고 나와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미소를 띤 채 앉아 있었다. 아빠는 나를 술잔 앞에 꼭 붙들어 앉혀 놓고 그런 이야기들을 주절거렸다. 그래서 그게 뭐.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아빠는 자신을 속인 것뿐이다. 정말 사랑했다면 그랬던 적이 단 한순간이라도 있었다면 엄마를 때리지는 못했을 거다.

애초에 볕이 들지 않는 집에 사는 식구들은 사랑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다. 적어도 우리 가족은 그렇다. 식물조차 일조량이 부족해 말라 죽어버리는 집 같은 곳에서는 사랑을 배울 새가 없다. 사랑은 대단한 능력이다. 상대의 고통에 공감하는 걸 넘어 네가 다치면 내 몸이 아픈 것이다. 그러니 정말로 사랑했다면 엄마를 때리지 못했을 거야. 내가 코를 훌쩍이면 놀라 병원에 데려가거나 약을 먹이고 마음을 다해 돌봤겠지만 그런 사람은 단 한 번도 우리집에 없었다. 어쩌면 가난하고 무식해서 사랑하는 법도 배우지 못한 게 아닐까? 나도 학교에 다녔지만 다른 애들은 학원에서도 배우고 과외에서도 사랑하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아니다. 사랑의 능력은 태어나기 전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거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면 어디 반박해보라지. 나는 아무도 사랑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을 테니까.

동네 사람들에게 묻고 물어 부동산에 찾아갔다. 단발머리를 한 여사장이 나를 수상쩍게 흘끗거리고는 집 구하는 조건을 물어봤다. 평수 상관없이 싼 집이요, 대답했다. 여사장의 모닝차가 달리는 동안 아무리 봐도 잠무에는 오래된 주택들뿐이었다. 천장이 무너져버린 폐가도 심심치 않게 지나쳐갔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여사장은 골목에서 튀어나온 자전거를 보지 못해서 깜짝 놀라 브레이크를 밟았다. 욕을 할 줄 알았는데 하마터면 볼 집을 지나칠 뻔했다면서 후진을 해 자전거가 나온 골목으로 들어섰다. 골목은 여사장의 차가 모닝인 게 감사할 정도로 좁았다. 안개는 골목 사이사이 작은 틈 하나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소개받은 집은 깊지 않은 골목 중간쯤에 있었다. 작은 화장실과 작은 창문이 하나씩 딸린 다세대 주택이었다. 보여줄 매물이 이게 다였는지 여사장은 이 집이 얼마나 조용하고 주인의 간섭도 없이 살기 좋은지 계속 떠들어댔다. 나도 고민하지 않았다.


별희

잠무에 도착했을 때 은이 어째서 이토록 희부연 곳을 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내가 없는 곳에서 모든 걸 지우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발길을 돌릴 수도 없었다. 나는 막 버스에서 내렸고 돌아갈 길을 알아두지 않은 채였다. 막연하게 은이 있다는 곳을 좇아서 왔을 뿐 아무런 계획도 대책도 없었다. 먼저 머물 곳을 찾아야 했을 테니 부동산을 찾아가는 게 맞는 방법일 듯했다. 번듯한 빌딩 하나 없는 잠무에서 은은 무얼 하고 있을까. 정말 이런 곳에서 먹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내가 찾아올 수 없는 곳이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시렸다. 너는 나에게 진짜였던 적이 없어. 그렇게 말하고 은은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일어나 앉아보라고 이불을 벗겼다. 대화가 끝나지 않았으니 자면 안 된다고 은을 윽박질렀다. 진짜를 말할 자신도 없으면서. 그런 아픔이 선연하게 되살아났고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은을 잠무까지 몰아냈다.

부동산 여자는 사무실용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나는 몇 번 헛기침을 했고 그래도 깨지 않는 부동산 여자의 테이블을 두어 번 두드렸다. 화들짝 놀란 부동산 여자의 단발머리가 경쾌하게 흔들렸다. 젊은 여자가 집을 구하러 오지 않았는지 물었다. 미심쩍게 바라보는 눈초리가 오랜 습관인 듯했다. 무슨 관계신데요? 이런 물음을 오랫동안 받아보았지만 나는 언제나 룸메이트였다. 그 정도가 사실이면서 더 이상 꼬리를 물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우리는 척 보기에도 닮지 않아서 가족관계로는 설명하기가 난처했다. 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우리는 가족이었지. 삼시 세끼 같은 밥을 먹고 한 이불을 덮고 자는 그야말로 가족이지. 부동산 여자가 쏟아진 단발머리를 넘기며 문서를 뒤적이는 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문서상 우리는 동거인이기는 했다. 부동산 여자가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달리는 모닝 안에서 안개 속에 파묻힌 아침 해를 보았다. 어느 골목에서 차는 꺾어 들어갔다. 걸어서 이 길을 다시 오라면 못 찾을 것 같았다. 나는 마지막이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은을 찾아보는 마지막 기회. 은을 잠무까지 내몬 죄로 이 정도 기회도 나에게는 사치라고 생각됐다. 그냥 놓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은이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만 하자, 마지막 욕심을 내보았다. 골목의 중간에 멈춰선 모닝에서 부동산 여자를 따라 내렸다. 오밀조밀 모여 있는 다세대 주택, 어느 집 문 앞에 우리는 섰다. 초인종이 없어 문을 몇 번 두드리고 계세요, 여러 차례 불러보았지만 아무 미동이 없었다. 이제서야 부동산 여자가 선뜻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게 미심쩍었다. 근데 이렇게 확인도 없이 저를 데려오셔도 되는 거예요, 묻지 않았는데 항변하듯 부동산 여자가 말했다.

젊은 여자 혼자 아무것도 없는 동네에 집을 구한다는데 걱정스러워서요.

집에 없는 거 확실한가요?

집 주인한테 한번 물어볼까요?

부동산 여자는 나를 그대로 두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노인과 작게 대화를 주고받는 소리. 잠시 후 계단을 내려와 말했다.

젊은 아가씨가 성실해서 근처에 일을 하구 지낸대요. 가보겠어요?

일부러 친절을 베푸는 부동산 여자에게 뒤늦은 미안스러움을 느꼈다. 나는 사례비를 조금 건넸다. 적어준 쪽지를 보니 엉성한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확실히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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