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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알려줘 2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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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희오 Sep 13. 2024

<이별시대> -2-

별희

은과는 전공 시 수업에서 만났다. 전공생 외에도 타학과 학생들, 편입생 등도 포함해 구성된 수업이었다. 나는 문학을 전공했지만 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은의 시는 단번에 읽는 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처음 쓴 시라고는 믿기 어렵게 재능이 돋보였다. 모두가 은을 우러러보았다. 정확히는 은의 시 세계를. 하지만 나는 그보다 은에게 관심이 갔다. 볼펜을 꼭 쥐고 수첩에 시를 적어 내려가는 하얀 손가락, 투명한 뿔테 안경 너머의 기다란 속눈썹, 너무 높지도 낮지도 않은 콧날, 살짝 부은 듯 부푼 두 뺨 그리고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작고 얇은 둥근 입술. 은의 키는 나보다 작았고 멀리서 달려와 나에게 폭 안기기를 좋아했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을 무렵부터.

우리는 스며들 듯 가까워졌다. 예견된 일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됐다. 함께 앉아 시 수업을 들었고 때로는 같은 주장을 때로는 상반되는 주장을 열띠게 이야기했다. 불꽃 튀는 토론을 하고 나서는 허겁지겁 서로를 안았다. 사랑에 굶주린 사람들처럼 나는 은의 품에 은은 내 안으로 파고들었다. 지속되는 열정만큼 갈등도 오래 풀리지 않고 계속됐는데 문제는 언제나 같았다. 친구 산은 은과 짧게 연애를 했었다.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았지만 나는 은과의 관계에 간섭하고 싶지 않았고 친구로서 산이 마음에 들었다. 산은 은을 따라 시 수업을 들었다. 은과 내가 연인이 되기 전부터 우리 셋은 친구가 됐다. 산을 좋아하면서도 내 신경은 언제나 곤두서 있었고 은과 둘이 남게 되면 뭐라도 트집 잡아 싸움을 걸었다.

은과 함께하는 내내 나는 중심이 없는 사람이었다. 관계가 흔들리면 나는 흩어질 듯했다. 사랑이 없으면 나도 없었다. 그럴 듯한 기분이 들뿐 아니라 물리적으로 내 몸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은과 다투고 나면 몸 끝이 투명해지거나 바스라지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아주 어둡고 상처받은 글을 잔뜩 적어 내려가고 싶어졌다. 온통 몸속에 검정뿐인 사람처럼 끝을 모르고 떨어지고 싶었다. 검정은 은뿐 아니라 그 모든 사랑 그리고 사랑을 하기로 택한 내가 나에게 가한 어둠이었다. 반복된 싸움은 지칠 대로 지쳐버렸다고 생각했을 때 더 지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했다. 스무살 때와 별다를 것 없이 다시는 사랑하고 싶지 않다는 부질없는 마음을 품었다. 사랑은 실재했으나 언제나 짧았고 차라리 고통이 더 길었다. 어쩌면 그때 일찍이 끝을 맺는 게 현명한 일이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우리는 우둔한 사람이어서 관계를 진창 속으로 끌고 들어가기를 서슴지 않았다.


태경

도르래에서 한 장씩 옷이 떨어진다. 산뜻하게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마친 의류들. 그 사이를 차례로 지나다니며 커다란 빽에 구겨지지 않도록 그것을 털어 넣는다. 한쪽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불가방들은 번호에 맞게 손수 분류해야 하고, 나는 말없이 분주한 사람들 속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걸어 다녔다. 옷에 붙은 라벨이 내가 가야 할 곳이었다. 세탁된 옷들에게도 돌아갈 집이 있지만 나에게 그런 건 없다. 엄마가 아빠를 떠나고 나도 아빠를 떠났다. 두 번이나 버림받은 아빠는 죽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애초에 우리가 없던 것처럼 어제와 같은 오늘을 살아가고 있을지도. 주먹에 감기는 살갗이 없으니 허공을 휘두르다 몸을 조금 휘청였을 것이다. 나는 돈을 벌기로 했다. 계속해서 벌기로 했다. 돌아갈 곳을 만들기 위해서 돈을 모았다. 바라는 집도 없으면서 온종일 일했기 때문에 쓰는 시간보다 버는 시간이 많았다.

처음 돌아가는 곳으로 정한 건 고시원의 옥탑이었다. 창가를 가득 채운 책상과 반대편 벽에 배치된 프레임 없는 낮은 침대, 서서 겨우 씻고 쌀 수 있는 화장실이 전부였다. 고시원 건물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꼭대기 층에 다다라 다시 철계단을 올라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방이었다. 고시원 매니저는 옥상을 단독으로 사용할 수 있는 이 방의 장점에 대해 거듭 말했지만 계약 후 얼마되지 않아 수시로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며 큰 소리로 통화를 해대는 장소라는 걸 알았다. 가래를 끓고 침을 뱉으며 떠나는 곳이기도 했다. 창밖에서는 끊임없이 인기척이 났고 나는 누군가 철계단을 올라오지 않을까 신경을 곤두세우고 지냈다. 아주 늦은 새벽이라도 그랬다. 돌아가기로 정한 곳은 하루 빨리 떠나고 싶은 곳이 되었고 그럴수록 더 많은 일을 구하게 됐다.

짬짬이 할 수 있는 파트타임도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생각이 많아지는 지루한 업무여서 되도록 몸을 혹사할 수 있는 일을 골라서 했다. 여름내 했던 일 중 하나는 업무 강도보다도 까탈스러운 날씨에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쉽게 피로해졌다. 공고에는 기내청소업무라고 설명돼 있었지만 정확히는 좌석을 정리하는 일에 가까웠다. 승객들이 내린 틈을 타 어지러워진 비행기 좌석의 벨트와 책자를 정돈하고 쓰레기를 비우는 일이었다. 변동이 많은 비행 스케쥴에 따라서 컨테이너 박스나 간이 대기실에서 시간을 때웠는데, 엄마뻘의 여사님들이 이것저것 물어왔다. 나는 되도록 말을 아꼈다. 그러면 측은하다는 듯 간식으로 나오는 빵과 우유를 너도 나도 내 가방에 쑤셔 넣어주었다. 그들은 일찍이 궂은 일을 하는 나를 기특해했고 그 징표로 내 가방에 눈 코 입 달린 먹구름 모양의 인형을 달아주었다. 그때 내가 돌아가기로 정한 곳은 이륙하는 비행기 소음이 다 들리는 5평 원룸이었다. 그 문자가 오기 전까지는 나름대로 흡족할 만한 방이었다.


[오늘도집에없구나]


나는 단번에 그 문자를 보낸 사람이 엄마이며, 그가 말하는 집이 나의 5평 원룸이라는 것도 알았다. 바뀐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가 이미 전부터 내 거처를 파악하고 있었고 처음 방문한 게 아니라는 점만이 내 심장을 뛰게 했다. 볕을 쫓아 나가버린 이가 결국에 찾는 것이 나였다니 속이 쓰렸다. 그가 나를 찾고 있다는 게 돌아왔다는 것을 의미할까? 아빠가 아니라 왜 나였을까? 아빠가 죽어버려서 차선책으로 나를 찾은 걸까? 내 답장을 바라지도 않았단 듯 한 통의 문자가 또 전송되어왔다.


[돈100만부쳐라]


공항과 공항 안의 사람들, 공항 인근의 5평 집을 버리기로 결심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멀리 아주 멀리 가버릴 것이다.


별희

 은이 세상에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사라지던 전날 밤. 잠든 은의 감긴 눈두덩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정말 못생겼네. 잠든 얼굴을 보면 누구도 미워할 수가 없다는데 나는 은에게 화가 났다. 못생긴 주제에 속을 썩이고 말이야. 이 얼굴을 안 보고 살 수도 있겠다는 예감 같은 게 들었다. 그와 동시에 은에 대한 그칠 수 없는 사랑의 마음을 느꼈다.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모남에도 불구하고 은을 사랑하자고 다시 한번 다짐한 셈이니까. 어떤 슬픈 마음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내 노트를 보았는지 잠들기 전 은이 물었다. 진짜로 있었던 일이야?

이튿날 새벽 출근을 해야 하는데 늦잠을 자서 인사도 없이 집을 나왔다. 늦어도 택시는 탈 수 없는 먼 거리의 회사여서 부랴부랴 양해 문자를 보내고 열차를 탔다. 돌아갈 수도 없으면서 무언가 두고 온 느낌이 들었다. 수집된 음성 데이터를 타이핑하고 카테고리에 맞게 분류하는 일이었는데 평소 하지 않던 실수를 많이 해서 지적을 받은 날이기도 했다. 야근을 없게 하라는 회칙에 따라 미스 난 작업량을 채우기 위해 점심시간에도 작업을 했다. 은에게 연락하지 못했고 연락이 왔는지 확인할 짬도 없었다. 바쁜 가운데 하루 종일 마음 속에서 은의 물음이 계속 메아리 치는 것만 같았다. 진짜로 있었던 일이야? 나는 잠깐 망설였다. 아니, 꿈이야.

만원지하철에 끼어서 겨우 집에 돌아왔을 때는 모든 게 그대로였다. 은은 실오라기 하나 챙기지 않고 사라져버렸고, 나는 잠깐의 외출이겠지 개처럼 은을 기다렸다. 잠시 후 전화번호도 사라져버렸다. 며칠은 얼이 빠졌고 며칠은 다급하게 은의 흔적을 찾아 다녔다. 은이 일하던 공장, 은의 측근, 은의 SNS, 멀디 먼 은의 본가까지 기웃거려보았지만 아무런 단서도 얻을 수 없었다. 이후로는 기억이 끊기도록 술을 마셨고 깨지 않은 채로 출퇴근을 반복했다. 취해 있는 동안에는 대부분 은을 저주했다. 잠시라도 맨정신이 들면 내 잘못을 헤아릴 수 없어 괴로워하다가 다시 술을 마셨다.

깔끔하네, 산이 말했다.

말이냐? 나는 눈을 흘겼다.

솔직히 언니, 동거하다 찢어지는 게 얼마나 복잡하구 추잡해.

그건 그런데 그래도 잠수이별은 좀. 너도 당해봐, 사람이 돌아버려.

나랑 헤어질 때도 그랬어, 걔. 그러다 갑자기 짠. 지 멋대로잖아, 원래 좀. 그러려니가 안돼?

되겠냐? 씨발.

산은 내 어깨를 투닥이고는 소맥을 말았다.

지 일 아니라고 쉽게 말하네, 야. 그래도 넌 10년 동거는 아니었잖아.

그래 그래. 언니 말이 다 맞으세요.

산이 말아준 소맥은 정말 최고의 비율이었다. 따라하고 싶어도 그 맛이 안 났다. 헛웃음이 났다. 전여친의 전여친에게 위로 받는 이게 대체 뭐람. 내가 은에게 한 대답은 거짓말이었을까. 노트에 적힌 것은 꿈이 맞았다. 하지만 사실에 근거한 꿈이었다. 예술대학 신축건물이 공사를 시작하던 무렵. 축제가 쓸고 지나간 대학 캠퍼스에 나뒹굴던 쓰레기들. 가죽이 벗겨진 야생동물들의 사체더미와 그 속에 헐벗은 나.

그때 산의 전화벨이 울렸다. 소리가 워낙 우렁차서 산도 놀라 잽싸게 전화를 받았다.

나 별희언니랑 있지. 왜.

한순간 산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어디라고?

통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은 소식이라는 걸 직감했다.

왜, 뭔데. 빨리 말해.

진짜 말해?

어. 안 하면 너 감금당할 줄 알아.

……잠무.

계산 좀 해. 보내줄 테니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노가리 집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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