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온통 미간을 찌푸리고 보고 서 있다가 성큼 다가와 말을 걸었다. 내 아이스크림 내가 맘대로 먹는다는데 무슨... 웃기는 사람이네 하고 돌아서려는데 그가 플라스틱 스푼을 쑥 내밀었다.
그렇게 시작되었다. 물티슈로 손을 닦아주고 그가 스푼을 쥐어 주던 그 첫날, 윤서와 그는 손을 잡고 숲을 걸었다. 아이스크림의 온도에 대해, 색깔에 대해, 갖가지 맛에 대해, 온종일 흥분한 채로 재잘대며 사람을 만난 행복을 첫날부터 느끼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퍼올리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에 질겁하는 그를 놀리며 팔짱을 낄 때부터 윤서의 예리한 직감은 이물스러운 놀라움을 탐지해 냈다. 이게 뭐지? 그는 팔짱을 낄 때마다 흠칫 윤서와 거리를 벌렸다. 씩 웃는 그가 더 낯설었다. 웃으며 피하는 거리 사이에는 어떤 공식이 있는 걸까.
그의 심장 가까이 손을 얹고 백허그라도 하려고 하면 그는 윤서의 두 손을 잡아 간격을 벌리곤 했다. 그때마다 그가 하던 한마디였다.
'네 손은 퇴폐적이야.'
대체 어쩌란 말인가. 퇴폐적이어서 뭐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고통이 있는지 어떤 갈증을 주는지 무겁고 차가운 표정의 두려움은 말로도 텍스트로도 윤서에게 건너오지 않았다. 만나면 그저 밥 먹고 차 마시고, 가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윤서가 손가락 장난을 하고 그가 소스라치는 그런 지루함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다음에는 키스를 해야지. 윤서의 당돌했던 생각에 그녀 자신도 쓸쓸히 웃는다. 뭐가 왜 어떻게 되고 있는 거야. 사람이 너무 어렵잖아. 그런 2년의 시간과 그들이 채웠던 공간들이 박물관에 박제되듯 쌓이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너무 뜨거워서 견딜 수 없어. 내가 다 타버릴 거야.'
그의 단어 '퇴폐'는 윤서 손의 온도였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으로부터 건너온 뜨거운 윤서의 손 그리고 손가락과 손톱, 결국 손으로 흐르는 그 뜨거움에 타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였던 거였다.
타 죽으면 안 돼? 그게 사랑 아닌가?
그는 일주일 내내 연락하지 않았다. 이삼일에 한 번씩 만나 마주 보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노래를 부르던 윤서에게 톡도 전화도 메시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새벽 받은 그 두 단어, 종결 처리 부호다.
'잘 지내.'
까만 일주일, 그 육십만 사천 팔백초의 시간이 빠져나가는 동안 윤서는 마주할 공포에 대해 예행연습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새벽을 뚫고 날아온 그 짧은 말에 가슴이 찢겨 나가는 듯 오열하고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 구두코 위의 눈물을 휴지로 닦았다. 눈 안에 가득 찬 눈물보다 세상을 딛는 발을 감싸는 구두 위의 눈물이 훨씬 더 무거운 것 같았다. 그래, 그래도, 그렇다 해도 걸어볼 거야.
'내가 네 손을 잡았을 때 네 손목의 동맥이 끓어올라 터지려 했다는 거지? 내가 너무 뜨거워서? 내가 네 팔짱을 끼었을 때 팔목 안쪽의 그 푸릇한 혈관이 두근거리다가 파열될 것 같았다는 거지? 내 손이 너무 뜨거워서? 내 손이 너무 퇴폐적이어서 네 갈비뼈 안의 심장이 푸드덕 터져버릴 것 같았다는 거지? 그치? 맞지?'
툴툴 털고 일어났다. 2년간 그를 뜨겁게 마주했으니 후회는 없다. 키스라도 했으면 그는 화라락 타 죽어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윤서가 지금 그를 살려주는 중이었다.
윤서는 다시 세상을 향해 그녀의 뜨거운 손을 뻗었다. 윤서보다 더 뜨거운 사람을 만나면 될 일이었다.